그래픽 디자인은 시각 매체에 텍스트와 이미지를 배치해 내용을 전달하는 기술과 실천을 가리킨다.
2005년은 호주제에 대해 헌법 불합치 선고가 내려진 해이고, 2015년은 간통죄가 위헌으로 판결된 해다.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은 이 항목들을 직설적이지만 다소 불안정하게 연결한다.
제공 | 일민미술관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은 그래픽 디자인 전시에서 쉽게 떠올릴 만한 풍경을 제공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이곳에는 포스터나 책, 잡지나 로고타이프 등 익숙한 물건이 거의 없다. 쉽사리 버려지는 일회성 인쇄물 도서관(불완전한 리스트)을 제외하면, 그것들은 실물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로 정돈되거나(101개 지표), 초 고해상도 사진으로 환원되거나(IMG), 정체가 모호한 물체로 변형되거나(3차원 세계의 화답), 낱말 단위로 해체 · 재구성되거나(기법 /// 누적된 선언으로 도출되는 기록이 물리적 방식으로 종이에 나타난다.), 아예 3개 층 전시장을 관통하는 기둥이 되어 나타난다(빌딩). 그래픽 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사회관계를 중심으로 파악되기도 하고(스몰 월드), 시각 문화의 역사와 연관해 설명되기도 하며(걸작이로세!), 세계사와 결부된 사건이 되기도 한다(33). 그런가 하면, 전시는 그래픽 디자이너의 생산수단과 무의식 사이에 존재할 법한 풍경을 상상해 보기도 하고(요세미티 산에서 외골수 표범이 흰 사자와 우두머리 호랑이를 뛰어넘는다), 디자인 생산물이 파편화된 모습으로 이어 가는 사후 세계를 그려 보기도 한다(그2서, 리소 프린트 숍, 일백일자도).
이런 연출을 두고 누군가는 지나치게 에둘렀다고 생각하거나 필요 이상으로 멋을 부렸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래픽 디자인 전시에 관해서는 이처럼 ‘해석된 풍경’을 보여 주는 것이 오히려 정직하고 직접적인 방법일지도 모른다. 실제 생활공간이 아닌 미술관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참으로 ‘있는 그대로’ 보여 줄 방법은 없다. 그런 목적으로 행해지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픽 디자인은 자기 충족적인 활동이 아니라 내용과 맥락에 의존하는 활동이기 때문이며, 또한 협력자와 사용자에 의해, 그들이 더해 주는 시각과 의미에 의해 확장, 설명, 변환, 향유되는 예술이자 언어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2016년이다. 11년 전 서울에서는 붕가붕가레코드 로고가 그려졌고, 모다페 2005 포스터가 인쇄되었다. 바로 1년 전 서울에서는 그래픽 디자이너 두 명이 동성애자를 위한 첫 서점을 열었다. 이 모두는 이미 어제의 세계가 되었다. 늘 그렇듯, 우리에게는 내일이 남았다.
<월간 PT 2016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