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나는 회사를 경영하며 직원들의 가슴을 움직이는 경영인이 있다. 어느날 서점에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책을 읽은 다음 날 회사에 사표를 제출한 뒤 굴삭기에 장착하는 어태치 먼트를 생산·수출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기계전시회인 뮌헨 바우마 전시회에 어태치먼트류를 전시하는 데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국내최초로 미국 수출길도 열었다.
또한 국내 인더스트리 4.0의 모체가 된 스마트 팩토리 만들기를 최초로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사업에 도전하다
30대 초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김우중 저)라는 책을 단숨에 읽고 다음 날 아침 7년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썼다. 자본금 500만 원으로 세계를 대상으로 기업 활동을 시작한 김우중 씨의 이야기를 읽으며 좌충우돌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부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책장사를 시작할 정도로 독립성이 강했고 고등학교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혼자서 고향인 청주와 서울을 동분서주하며 어른들과 담판을 지을 줄도 아는 당찬아이였다. 그에 비하면 너무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도 들었다고 한다.
“유한공고에 합격을 했어요. 학비는 전액 무료였지만 입학금을 내야한다는 말에 무작정 중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빌려달라고 사정을 했죠. 교장선생님이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네가 반을 구해 오면 반을 대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순간 진학사의 장학생모집공고에서 본 ‘책을 많이 파는 학생에게는 장학금을 준다’는 문구가 떠올랐어요. 그 출판사 책을 팔아가며 생활비를 벌었는데 잘할 때는 전국 2등도 한 적이 있었거든요. 서울에있는 진학사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서울 갈 차비가 없어 어머니에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더니 속옷 깊숙이 고무줄에 묶어숨겨두었던 비상금을 꺼내주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지니고 계셨던 것일까. 그 꼬깃꼬깃해진돈을 꺼내주시던 어머니 표정을 잊지 못한다. 다음날 새벽 첫차를 타고 상경을 해 꼬박 하루를 기다린 우여곡절 끝에 장학금을 받아 막차를 타고 내려왔다.
“중학생 시절을 그렇게 보냈던 나였어요. 김우중 씨도 중학교 시절 그렇게 당차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의 결기로 사업을 시작한겁니다.”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다
그렇게 1989년 회사를 설립, 그는 시작부터 세계를 시장으로 삼겠다고 목표를 정했다. 사업을 시작하고 1년만인 1990년, 세계 최대 건설 기계 및 장비 박람회라는 독일 뮌헨의 바우마 박람회에 찾아간다. 독일어는커녕 영어도 못하지만 깡다구 하나만 믿고 건너간 것이다. 그는 말 한마디도 못한 채 전시장을 일주일 내내 걸어 다녔다.
“참 이상한 게,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기계 전시회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만든 기계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요. 이곳에 내가 만든 기계를 반드시 출품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일하고 싶은 강소기업 대모엔지니어링은 협력사와 함께 성장하는 상생 경영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편견을 깨고 유압 어태치먼트 분야 국내 선두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의 결심은 2년 만에 실현되었다. 당시 현대중공업에서 굴삭기를 출품했는데 이때 굴삭기의 용도를 다변화시킬 수 있는 어태치먼트 장비로 대모엔지니어링의 제품을 가지고 나간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태치먼트 바우마 전시출품 사례가 되었다. 이후 국내최초로 미국 수출길도 열었다.
이원해 회장이 말도 통하지 않는 바우마전시회를 돌아다닐 때 한글판 회사 소개서에 영어스티커를 붙여서 전시회 카탈로그 꽂이 몇 군데에 슬쩍슬쩍 꽂아둔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2년 후, 호주의 한 기업에서 한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어요. 제가 2년 전에 뮌헨전시회에 꽂아두었던 카탈로그를 꺼내 놓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차곡차곡 세계 시장을 넓히면서 그동안 수입에 의존하던 어태치먼트류의 장비를국산화해 58개국에 수출하는 수출기업으로 성장했다. 세상은 넓었고 할 일은 많았던 것이다.
사람을 우선하는 경영이 회사를 살린다
올해로 창립 29년째, 대모엔지니어링은 IMF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등을 겪으면서도 꿋꿋하게 견디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설 어태치먼트류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원해 회장은 성장의 비결로 ‘사람중심 경영’을 꼽았다.
실제로 대모엔지니어링은 취준생들 사이에는 대기업 못지않은 직원복지로 입소문이 나 있는 기업이다. 이원해 대표는 영어학원 다니라고 학원비를 대주거나 놀 때는 신나게 놀라고 동호회 운영비를 지원하는 식의 ‘자잘한 것들’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이원해 대표의 사람 중심 경영은 창립당시부터 지켜온 신념이다. 유행양행 창립자이자 그의 모교인 유한공고의 설립자이기도 한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따르는 중이라고 말한다. 유한양행의 기본 철학이 신용과 정직이었다.
“가끔은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유일한 박사님은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면 답은 아주 심플하게 나옵니다. 여태껏 별 일 없이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을보면 그것이 맞는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망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직원들을 키워놨더니 독립해서 경쟁사를 차리는 경우도 있었다. 힘에 부대끼면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이들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말없이 받아주었다. 유일한 박사가 학생들에게 투자할 때 조건을 달지 않았던 것처럼 ‘대신, 우리회사에서만 열심히 일하라’는 조건을 붙이지 않기로 한 것이다. 오히려 견제할 수 있는 경쟁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약이지 독은 아니라는 것이 이원해 회장의 생각이다.
대모엔지니어링의 앞선 기술력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미국, 중국, 벨기에 해외법인 등 세계 80여 개국 판로를 보유하는 등 글로벌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이익을 직원들과 나누는 경영혁신 그리고 스마트팩토리의 모체
승승장구 하던 회사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2004년 즈음이었다. 건설기계가 호황이라 수출물량도 부쩍 늘어나던 시기였다. 그런데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생산량을 늘리면서 불량률이 높아진 것이다.
“그때 아주 중요한 딜러로부터 불량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았어요.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고심 끝에 엄청난 투자를 하며 경영 컨설턴트의컨설팅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8년에 걸쳐 경영혁신을 했습니다. 경영혁신 첫 해에컨설턴트가 연간 목표를 5억으로 잡았어요. 전년도 매출이 2억에 불과하던 시절이라 5억도 긴가민가 했는데 5억이 넘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5억이 넘으면 반을 뚝 잘라서 직원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직원들에게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해 매출이 얼마였는지 아세요?”
5억을 넘어 9억의 매출을 얻은 것이다. 직원들과 한 몸이 되어 경영혁신을 한 결과였다. 약속대로 4억의 반인 2억을 직원들의 연말 성과금으로 돌려주었다.
그게 소문이 나서 대모엔지니어링은 신입사원에게도 연봉 4000만 원을 주는 회사라는 입소문이 났다. 내부 혁신에만 그치지 않았다. 대모엔지니어링 공정의 80%를 담당하는 협력사의 혁신에도 나섰다.
“혁신의 힘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협력사의 혁신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마침 ‘스마트 공장 만들기’를 추진 중이던 기계산업동반성장진흥재단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때 제가협력사의 혁신을 제안했어요.”
효과는 놀라웠다. 혁신에 참여한 협력사는 매출은 오르고 불량은 줄고 이익은 늘어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스마트 팩토리 사업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지금 한창진행 중인 인더스트리 4.0의 모체가 되는 스마트팩토리 공장 만들기가 대모엔지니어링에서 시작된 셈이다.
올해 초부터 2차 경영혁신을 시작했다.
10년이 지나면서 직원들은 물론이고 스스로도 나태해졌다는 위기감이 들었고 회사의 위상이 높아진 만큼 내부적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경영혁신은 직원들을 두렵고 긴장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그러나 대모엔지니어링 직원들은 요즘 어느 때보다사기가 충전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원해 대표가 올해의 목표를 초과하면 연말에 70%를 직원들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했기때문이다. 10년 전의 달콤했던 경험치가 있으니 이 역시 불가능하지 않은 목표라는 것을알고 있다. 회사가 걸어가야 할 길을 직원들과 함께 걷겠다는 이원해 회장의 경영철학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