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으로 우뚝 선 한국 여자 프로골프, 그 중심에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가 있다
임진우 2018-07-02 08:52:55

(왼쪽부터) 김경자 전무, 이영미 부회장, 구자용 전 회장, 조동만 전 회장, 윤세영

 

(왼쪽부터) 김상열 KLPGA 회장, 김성희 전 회장, 강춘자 KLPGA 수석 부회장, 박세리

 

브라질 리우 올림픽 여자골프,  브라질 리우 올림픽 여자골프 금메달 박인비

 

현재 한국 여자 프로골프는 세계 최강이다. 미국 LPGA(여자프로골프협회) 투어는 물론이고 JLPGA(일본여자프로골프협회) 투어에서도 한국 선수들은 출중한 기량으로 빼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다. 2016년 116년만에 부활한 브라질리우 올림픽 여자골프에서도 한국은 박인비가 금메달을 따 골프 강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바 있다.
그 중심에는 KLPGA(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가 있다. 한국여자 프로골프를 대표하는 단체다. KLPGA는 1978년 한국프로골프협회(KPGA)내 ‘여자부’가 생긴 게 모태가 됐다.
그 10년 후인 1988년 정식으로 KLPGA가 KPGA에서 독립해 출범했다. 1978년 8명이었던여자 프로는 지금 1천명을 훨씬 넘어섰다. 2018년 1월 1일 기준 KLPGA 정회원 입회자는 1,216명이다.
KLPGA 투어는 대회 수나 상금 규모에서 미국 LPGA, JLPGA 투어와 함께 세계 여자골프 3대 투어로 도약했다.
KLPGA 투어는 1부인 정규투어를 비롯해 2부(드림투어), 3부(점프투어)에 이어 시니어투어인 챔피언스투어까지 각종 투어가 연중 열려 활기를 띠고 있다. 특히 정규투어 대회에는 수많은 갤러리가 모여들어 인기를 실감케 한다.
그동안 한국 여자 프로골프는 구옥희, 박세리, 신지애, 박인비 등 걸출한 스타들이 나타나국내 골프의 저변을 확대하고 한국 골프의 위상을 높이는 데 이바지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구옥희는 한국 여자 골프의 선구자로 KLPGA 통산 20승, JLPGA 23승, 미국LPGA 1승을 거두며 초창기 한국 여자골프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그 이후 한국 여자골프는 박세리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맞아 대변혁을 이뤘다. 아마추어 때 프로 대회를 제패했던 박세리는 KLPGA에서 8승을 거둔 후 미국에 진출, LPGA에서만25승을 거뒀다. 박세리는 1998년 우리나라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 위기를 맞아 국민들이 실의에 빠져 있던 때 US여자오픈에서 극적인 우승을 거두며 국민들에게 감동과 용기를 선사했다. 특히 당시에 그가 보여줬던 ‘맨발 투혼’ 장면은 골프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고 있으며 지금도 많은 골프팬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우승에 감동을 받고 골프 선수의 꿈을 키운 ‘박세리 키즈’는 지금 한국 여자골프를 이끌고 있다. 신지애와 박인비도 바로 박세리 키즈다.
신지애는 6월 7일 현재 KLPGA 20승, JLPGA 16승, 미국 LPGA 11승을 거뒀다. 신지애는 한국 여자선수로는 처음으로 여자 세계랭킹 1위에 올랐다. 신지애는 지금 JLPGA 투어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다.
박인비는 현역 여자 골프 선수 중 최고의 선수다. 미국 LPGA에서 19승을 거뒀고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JLPGA에서도 4승을 거뒀으며 올들어 KLPGA 정규투어 두산매치 플레이에서도 우승했다. 박인비는 미국 LPGA 4대 메이저대회와 올림픽 금메달까지 휩쓰는 커리어 골드그랜드슬램이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갖고 있다. 박인비는 6월 7일 현재 여자 세계랭킹 1위다.

 

구옥희와 박세리, 신지애, 박인비는 모두 KLPGA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5월 14일 서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호텔에선 ‘KLPGA 창립 4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글 김대진 편집국장 사진 조도현 기자 KLPGA

 

KLPGA의 태동기(1978~1989년)
1978년 강춘자, 한명현, 구옥희, 안종현 등 최초의 여자 프로골퍼가 탄생하다

1978년 5월 26일 한국 최초의 여자 프로골퍼가 탄생했다. 로얄컨트리클럽에서 KPGA가 주관한 남자 프로테스트 현장 한쪽에서 제1회 여자 프로테스트가 따로 진행됐다. 이 테스트에서 강춘자, 한명현, 구옥희, 안종현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프로골퍼로 태어났다. 테스트를 치르는 3일간 강춘자, 한명현, 구옥희의 스코어가 똑같았으나 마지막 홀에서 강춘자가 버디를 잡아내면서 한국 여자프로 1번의 영예를 얻었다. 한명현, 구옥희, 안종현이 차례로 2번부터 4번까지를 차지했다.
같은 해 8월 김성희, 이귀남, 배성순, 고용학이 추가로 프로 테스트를 통과, 제1세대 여성골퍼 8명이 구성됐다. 1978년 9월 20일. 한양컨트리클럽에서 최초의 여자프로골프선수권대회인 ‘KLPGA선수권대회’가 열려 한명현이 우승했다. 당시의 여자프로대회는 남자프로대회 안에 여자부를 개설해 이루어지는 형식이었다.

 

당시 여자프로가 출전할 수 있는 대회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1978년엔 KLPGA선수권대회 뿐이었다. 다행히 1979년엔 KLPGA선수권대회, 삼양오픈, 쾌남오픈이 열렸고 각각 안종현, 강춘자, 구옥희가 우승했다. 그해 10월에 열린 쾌남오픈에선 대회 첫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망으로 시합이 취소돼 첫날 성적만을 계산, 구옥희가우승을 차지했다.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KPGA는 KLPGA 창립 멤버들에게 있어 여자프로를 탄생시켜준 고마운 존재였다. 그러나열악한 국내 골프환경과 남자프로대회에 ‘셋방살이’를 하듯이 참가해야했던 현실은 결코녹록치 않았다. 남자프로대회에서 일부를 나눠 진행된 여자부 대회는 상금과 규모면에서남자대회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연간 출전할 수 있는 대회수도 10개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선수들은 일본으로 진출한다.

 

여자프로 정회원 1,2기들의 단체 사진. 아래줄 왼쪽부터 한명현, 구옥희, 강춘자 [자료=KLPGA]

 

1982년 구옥희, 강춘자 등 일본 프로대회 초청선수로 출전. 1983년 한명현 구옥희 일본 프로테스트 통과
1982년 구옥희, 강춘자, 배성순, 안종현, 한명현 등이 일본 프로대회에 진출했다. 초청선수 자격으로 대회를 출전하던 중 1983년 상반기 프로테스트에서 한명현이 최초로 일본프로테스트를 통과했다.
이어 1983년 후반기엔 구옥희가, 1984년엔 강춘자가 1위로 프로테스트에 합격하며 본격적인 일본 활동에 들어갔다. 당시 그들의 일본생활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타국민이라는 이유로 시합 중에 불합리한 판정을 받기도 했고 김치냄새, 마늘냄새가 난다며 자신들을 피하고 낮춰보는 시선들을 견뎌내야 했다고 한다.
1984년 구옥희가 최초로 일본프로대회에서 우승했다. 구옥희는 그 다음 주에 개최된 대회에서도 우승을 거머쥐며 JLPGA 2주 연속 우승이란 기록을 세웠다. 그 이후 구옥희는JLPGA 통산 23승을 달성하며 한국 여자 골퍼들의 해외진출에 초석을 마련했다. 구옥희는일본에 이어 미국 무대로 그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강춘자, 한명현, 구옥희


구옥희는 1984년 일본에서 열린 미국 LPGA 대회에 일프로 자격으로 참가해 3위를 차지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구옥희는 1985년에 US LPGA Q스쿨을 통과한데 이어 1988년 US
LPGA 스탠더드레지스터클래식에서 우승, 한국여자골프의 위상을 드높였다.

 

1988년 KLPGA 출범, 無에서 有를 만들어가다
1988년 여자프로부가 남자프로협회에서 분리돼 나와 정식으로 KLPGA가 창립됐다.
1978년 8명이었던 회원은 10년 만에 회원수가 50명에달했다. 당시 KPGA는 3,000만 원의종자돈을 내주며여자프로부의 독립에 힘을 실어줬다.
한국여자골프의 성장이라는 하나의 꿈을 꾸며 다함께 씨앗을 심고 튼튼한 떡잎을 틔워낸 1978년부터 10여 년은 KLPGA 30년 중 가장 열악하고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힘든 줄도 모르고 열정 하나로 앞으로 나아갔던 기간이기도 했다.
초창기 창립 멤버들은 최초로 여자프로가 되고, 최초로 해외진출을 하고, 최초로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를 창설한 것이다. 그들이 걸어간 길은 모두 최초였고 그대로 역사였다.
1970, 80년대는 한 마디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가는 창조의 시대’였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그저 열심히 연습한 기억 밖에 없다는 구옥희, 손바닥이 찢어져 피가나는 줄도 모르고 연습하다가 집에 가는 길에 보니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던 한명현, 골프클럽 풀세트가 없어 하프세트를 빌려서 대회를 다녔는데 샌드웨지가 없어 9번 아이언으로만 벙커샷을 치다보니 어느새 벙커샷의 달인이 되었다던 강춘자, 빈약하던 국내 여자대회 수를 늘리기 위해서 늘 동분서주했던 김성희….
돌이켜보면 끝도 없이 떠오르는 고난의 기억들은 이제는 “그땐 그랬어.” 라는 말과 함께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으로 남아 있다.

 

KLPGA의 성장기(1990~1999)
1990년대 국제적 골프무대로 거듭난 KLPGA 투어, 1999년 한·일 여자 프로골프 국가대항전 등 생겨 국제교류 활기 띠다

 

1997년 한화컵 서울여자오픈 우승 당시 한화 김승연 회장과 함께 한 박세리, 김미현, 고우순

 

1970~1980년대가 KLPGA 태동기였다면 1990년대는 성장기였다.
1980년대 후반에 비해 대회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아니지만 평균 총상금액이 증가하면서투어가 활기를 띄었다.
IMF 외완 위기를 맞이한 1997년과 1998년을 빼면 국내투어는 매년 상금액이 증가했다.
특히 1999년에는 경제 회생과 박세리의 활약으로 골프에 대한 관심이 커져 대회수와 상액이 크게 늘어났다.
KLPGA 역사상 최초의 국제대회인 서울여자오픈이 뉴코리아컨트리클럽에서 열렸다. 총상금 30만 달러(우승상금 6만 달러)로 당시로선 메이저급 대회로 KLPGA 투어의 볼륨을 키운 역사적인 대회였다.
1993년에는 동일레나운 레이디스 클래식과 FILA 여자오픈이 각각 총상금 1억 원을 내걸며KLPGA투어의 상금 1억 원 시대를 열었다.
1996년에는 SK에너지 인비테이셔널의 전신인 유공 인비테이셔널에서 총 상금 3억원을 내걸고 대회를 개최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1995년 국내 파라다이스 골프클럽에서 US LPGA투어대회 중 하나인 삼성월드챔피언십이최초로 개최되며 한국은 국제적 골프무대로 거듭났다. 그 대회에선 안니카 소렌스탐이 6언더파 282타로 우승을 차지했다.
1999년에는 한국과 일본의 스포츠 교류 및 우호 증진을 목적으로 한·일 여자 프로골프 국가대항전이 신설돼 2014년까지 계속됐다. 양국의 최고 스타들이 나선 이 대회에서 역대 전적은 한국이 7승 3패로 앞섰다. 2005년 대회는 한국과 일본이 동점으로 공동 우승으로기록됐다. 2008년 대회는 제주 핀크스 골프클럽에서 열렸으나 폭설로 인해 공식 대회 취소 후 9홀 이벤트성 대회로 대체됐다.
2015년부터는 한국과 일본 뿐만 아니라 유렵여자프로 골프투어(LET)와 호주여자프로골프투어(ALPG)가 함께 참가하는 ‘더 퀸즈 PRESENTED BY KOWA’가 일본 미요시컨트리클럽에서 매년 사흘간 열리고 있다.
첫 대회에선 JLPGA가 2016년 대회에선 KLPGA가, 그리고 2017년 대회에선 다시 JLPGA가 우승했다.

 

1990년대를 빛낸 KLPGA 선수들, 고우순 이오순 박세리 김미현 등이 등장해 국내 무대를주름 잡다
1990년대엔 KLPGA 투어를 빛낸 선수들이 많았다. 국내에선 1980년대 후반에 큰 활약을 펼쳤던 고우순이 1990년대 초반까지 KLPGA 투어 인기를 이끌었다. 고우순은 1989년부터4년 연속 상금왕의 왕좌를 지키며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1993년 JLPGA투어로 진출하기전까지 매년 2승 이상을 거뒀고 1990년부터 3년간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며 국내무대를평정했다. 일본에선 구옥희와 이영미가 시즌 1승 이상을 기록하며 큰 활약을 펼쳤다. 이 시기 국내 무대에는 박성자, 이오순과 같은 실력 있는 신인들이 등장했고 박세리, 김미현,서아람, 정일미, 신소라 등 프로 실력에 버금가는 아마추어들이 등장해 프로무대에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이오순은 1993년 고우순이 일본으로 진출한 뒤 그 자리를 꿰찼다. 이오순은 1993년부터 3년 연속 상금왕과 최우수선수의 영광을 차지하며 국내 투어 최고 스타로 급부상했다.
1992년 한국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이오순은 이어 서울여자오픈, 한주엘레쎄여자오픈 등1997년까지 연이어 5승을 거머쥐었다.
1990년대 초ㆍ중반 고우순과 이오순이 연이어 KLPGA투어를 평정하는 동안, 1980년대 3회 상금왕을 차지한 정길자, 한국여자오픈과 KLPGA 선수권대회 등 양대 메이저대회에서우승한 김순미 등 스타들의 활약도 1990년대 KLPGA 무대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박세리는 1995년 열린 KLPGA 정규투어 12개 중 톰보이 여자오픈을 비롯한 4개 대회에서아마추어 신분으로 우승컵을 휩쓸었다.

김미현도 1994년과 1995년 아마추어 자격으로 1승씩을 올리며 프로 못지 않은 실력을 뽐내며 주목을 받았다.

 

 

 

박세리와 김미현 등장으로 1990년대 국내 여자 골프계 지각변동이 시작되다
1996년 4월 한국여자프로골프계 지각 변동이 시작됐다. 박세리와 김미현이 동시에 KLPGA에 입회한 것이다. 한국여자프로골프의 양대 산맥이자 라이벌인 박세리와 김미현은 기존에 선배 프로들이 세운 기록들을 갈아치우며 한국골프의 역사를 새롭게 써내려갔다.
먼저 김미현이 입회한 지 2개월 18일 만에 미도파여자오픈에서 우승컵을 거머쥐며 데뷔 후 최단기간 우승기록을 세웠다.
세리는 그 다음 대회인 매일여자오픈에서 우승 기회를 잡았으나 연장 승부 끝에 선배인 박현순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사이 김미현은 최고상금액이 걸린 유공인비테이셔널 우승으로 시즌 두 번째 우승컵을 먼저 챙겼다.
이에 자극을 받은 박세리는 그 다음 주에 열린 동일레나운레이디스클래식을 시작으로 연속 3개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저력을 선보였다. 이후에도 김미현과 박세리는 1승씩을더 기록하며 골프계의 새로운 강자로 우뚝 섰다.
그해 시즌을 통해 최단기간인 5개월 26일만에 통산 상금액 2억 원을 돌파한 박세리는 1996년 상금왕과 신인상의 영예를 차지했고 최우수선수상까지 거머쥐었다.
반면 김미현은 상금랭킹 2위에 올라 우수선수상에 만족해야했다. 이듬해인 1997년, 김미현은 국내 투어를 계속해서 뛰면서 1997년과 1998년 2년간 상금왕의 자리에 올랐고 특히1997년에는 3개 대회에서 우승컵을 거머쥐며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박세리와 김미현, 미국 LPGA를 평정하다
박세리는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 갈 준비를 시작했다. 1997년 10월에 열린 미국 LPGA 투어 Q스쿨에서 미국 크리스티커와 공동 1위로 통과했다.

1998년 LPGA 투어 전 경기 출전권을 획득한 박세리는 LPGA 프로 데뷔 첫해에 메이저대회 중 하나인 맥도날드LPGA챔피언십에서 와이어투와이어 우승을 차지했다. 박세리는 그여세를 몰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US여자오픈에서 태국계 아마추어였던 제니 추아시리폰을 미국여자골프 역사상 가장 긴 92홀(20홀 연장)만에 물리치고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박세리가 이 대회 연장 18번째 홀에서 양말을 벗고 물에 들어가 샷을 했던 장면은 당시 경제 위기로 실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준 불후의 명장면이 됐다.
결국 박세리는 다시 연장에 들어간 후 두 번째 홀만에 추아시리폰을 누르고 우승컵을 차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박세리의 활약은 골프가 국민적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거듭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데 이바지했다. 같은 해에 2개 메이저대회를 석권한 박세리는 제이미파크로거클래식과 자이언트이글 LPGA 클래식까지 연달아 우승컵을 거머쥐며 한 시즌 4승을 거뒀고 LPGA 투어신인상을 수상했다. 우리 정부는 박세리의 국위선양 업적을 높이 사 체육훈장 맹호장을수여했다.
김미현은 1999년 미국 LPGA 투어에 데뷔해 신인상을 받았고 2007년까지 통산 8승을 거뒀다.

 

KLPGA의 개화기 (2000~현재)
지금까지 미국 LPGA 투어에서 167승, 한국계까지 합치면 199승.
2017년 KLPGA 소속 선수가 해외 투어에서 벌인 들인 총상금액은 246억 9,862만 6,242 원
2000년대 KLPGA는 세계적인 투어로 성장하며 세계여자골프의 중심에 당당히 서 있다.
특히 2005년을 전후한 시점부터 미국 LPGA 투어에서 한국 여자선수들의 수가 늘어나고그 활약이 두드러지면서 우승 횟수도 크게 증가했다.
6월 7일 현재 미국 LPGA 투어에서 거둔 한국 여자선수들의 우승 횟수만 167승이며, 한국계를 합친 우승 횟수는 199승이다.
한국 여자선수들의 기량은 현재 세계 최고다. 세계 여자골프 랭킹 1위 박인비를 비롯해 10위 안에 한국 선수들이 5명으로 가장 많다. 상위 100위 안에는 39명, 500위 안에는 150명이 한국 선수다.
2017년 미국 LPGA와 JLPGA, LET에서 KLPGA 소속선수가 벌인 들인 총상금액은 246억9,862만 6,242 원이다.

 

정규투어(1부)에 이어 드림투어(2부), 챔피언스투어, 점프투어(3부)가 차례로 창설되면서KLPGA 투어가 활성화되다
한국 여자골프가 이처럼 성장한 것은 KLPGA 투어가 활성화됐기 때문이었다. KLPGA 투어가 활성화되면서 국내에선 우수한 여자 선수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다. 수많은 골프스타들이 화수분처럼 등장하면서 KLPGA 투어는 미국 LPGA투어·JLPGA투어와 함께 세계적인 투어로 성장했다.

 

홍진주

 

안선주

 

그 배경에는 2000년대 만들어진 드림투어(2부)와 시니어투어, 그리고 점프투어(3부투어)가 있다. 정규투어를 뛰지 않는 선수들을 위해 창설한 이 투어들은 국내 골프를 더욱 활성화하고 실력 있는 선수들을 양성하는 매개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2000년 드림투어가 처음으로 창설돼 첫 대회에서 이선화가 우승했다. 초대 상금왕엔 조경희가 올랐다. 2015년 김아림과 박지연은 각각 시즌 4승으로 한 시즌 최다 우승횟수를 기록했다. 이후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이 드림투어를 통해 배출됐다.
이선화, 배경은, 안시현, 홍진주, 김나리, 지은희, 안선주, 홍란, 김하늘 등이 모두 드림투어를 거쳐갔다.
2004년에는 국내 골프 역사상 최초로 총상금 1억 2천만 원 규모의 시니어투어가 출범했다. 시니어투어를 통해 1980~1990년대 활약했던 과거 스타플레이어들의 모습을 오랜만에필드 위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됐다.
시니어투어에선 남정숙이 초대 상금왕에 올랐고 심의영, 김형임, 박성자가 차례로 뒤를 이었다. 그 외에도 한명현, 이오순, 최인자 등 왕년의 스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과거의 영광을 재현했다.
2014년 김희정은 시즌 5승을 달성, 시니어투어 한 시즌최다 우승횟수 신기록을 세웠다.
점프투어는 2006년도에 창설됐다. 첫 대회에선 김주영2가 우승했고 김혜민이 초대 상금왕에 등극했다. 2007년엔 박성자가 상금왕에 오르며 이듬해 정규투어 풀시드권을 확보했다. 특히 1990년대 초반에 큰 활약을 했던 박성자의 아름다운 도전은 후배 프로들에게 귀감이되었을 뿐 아니라 그해 점프투어와 시니어투어, 양대 투어의 상금왕에 동시 등극하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2010년 이예정은 5승을 거둬 한 시즌 최다승기록을 세웠다.
드림투어와 시니어투어, 점프투어의 창설과 함께 2000년대 여자골프는 한국을 대표하는하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여자골프, 한국을 대표하는 일등상품으로 거듭나다
삼성경제경구소는 2001년, 한국 여자 프로골프를 ‘한국을 대표하는 일등상품’으로 선정한 바 있다.
‘세계 여자골프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한국 낭자군단’ 이라는 부제로 발표된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국여자골프는 승수를 기준으로 세계 점유율 15%라는 놀라운 기록을 보이면서 D램, 인삼 등과 함께 세계 시장에서도 통하는 일등상품으로 꼽혔다.
구옥희를 시작으로 박세리를 거쳐 차세대 유망주들까지 실로 탄탄한 선수층을 형성하며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 여자골프는 이듬해인 2002년, 미국 24시간 뉴스 전문채널인 CNN이 선정한 10대 뉴스에 선정되는 등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으며 이슈의 중심에 섰다.
KLPGA 성장세는 회원 수 증가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978년에는 8명이었던 회원은 1999년에는 정회원 수 200명을 돌파했다. 2000년에는 역사상 최초로 대의원을 선출해 총회를 개최했다.
이때부터 KLPGA는 KLPGA 대의원이 회원들을 대표하여 임원을 선출하고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 단체로 거듭났다. 이후 KLPGA는 해마다 회원 수가 급격히 늘어 2003년에는 500명을 돌파했고, 2005년에는 티칭프로 제도를 도입하면서 KLPGA회원은 크게 정회원, 준회원, 티칭회원으로 나뉘게 되었다.

 

2003동양화재컵 SBS프로골프 최강전 박세리, 2004년 마지막으로 열린 SBS프로골프 최강전은 여자부 지유진(왼쪽), 남자부 최경주의 우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진=KPGA]

 

2000년대 스타 선수들 끊임없이 나와 한국을 빛내다
2000년과 2001년 KLPGA 투어에선 정일미와 강수연이 차례로 상금왕을 차지하며 국내 무대를 평정했다.
같은 해 각각 신인상을 수상한 고아라와 신현주도 유망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에는 이미나(2002년), 김주미(2003년), 송보배(2004년), 배경은(2005년) 등이 차례로상금왕에 올랐다. 특히 이미나를 시작으로 3년 연속으로 신인이 그해 KLPGA 대상과 상금왕, 신인왕까지 휩쓸며 루키 파워를 선보였다.
해외에선 박세리가 2001년부터 2년간 5승씩 총 10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최고의전성기를 구가했다.
한희원은 2001년 미국 LPGA 투어 신인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일본에선 이지희가 JLPG투어 신인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골프강국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2년에는 일본에서 구옥희와 고우순이 일본여자오픈을 포함한 3개 메이저대회를 모두석권했다.
2003년 한국 여자골프는 이슈 메이커였다.
박세리가 2003 동양화재컵 SBS골프 최강전에 출전해 성대결을 펼친 결과 2라운드까지 2오버파 146타를 기록하며 예선을 통과했고 최종일 ‘톱10’에 드는 쾌거를 일궈냈다.
또한 박세리는 그 해 미국 LPGA 투어에서 최저타수를 기록한 선수에게 주어지는 베어트로피를 수상하며 다시 한번 자랑스러운 한국 여자골프의 위상을 세계에 떨쳤다.
2007년 박세리는 전 세계 골퍼들에게 최고의 영예로 여겨지는 미국 LPGA 명예의 전당에최연소이자 최초의 아이사인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입성했다. 박세리는 같은 해 KLPGA 명예의 전당과 세계골프 명예의 전당에도 동시에 헌액되며 골프계의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다.
박지은은 미국 LPGA 투어에서 2003년까지 통산 4승을 거둬 우리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박지은은 2004년 메이저대회인 크래프트 나비스코 챔피언십에서 우승컵을 거머쥐며 ‘메이저 퀸’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박지은은 그해 2승을 거두고 베어트로피까지 수상하며 최고의 해를 보냈다.
2003년 국내에선 전미정이 레이크사이드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제5회 파라다이스 여자인비테이셔널 2라운드에서 11언더파 61타를 치며 역대 18홀 최소스트로크 기록을 세웠다.

 

박지은

 

국내에서 열린 유일한 미국 LPGA 투어 대회였던 2003 CJ나인브릿지클래식에서 안시현이우승컵을 차지하며 일약 골프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라 국민적 관심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이후 미국으로 진출한 안시현은 2004년 LPGA 투어 신인상을 받았다.
2004년 구옥희가 KLPGA 첫 명예의 전당에 입회하는 영예를 안았다. 국내 대회 20승, 해외대회 24승 달성 등 대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구옥희 박세리 신지애 박인비, KLPGA 명예의 전당에 오르다
안선주 이보미 전미정 고우순 명예의 전당 후보자에

2000년대 중반 박세리와 김미현을 비롯해 이미나, 장정, 김주연, 강수연, 한희원, 이선화,이지영, 홍진주, 김영 등이 미국 LPGA투어에서 우승하며 한국 여자선수들의 우승 공세가 시작됐다.
2005년부터 2년간 한국 여자 프로선수들이 미국 LPGA 투어에서만 19승을 달성했다. 국내에서 열린 2005년 CJ나인브릿지클래식에서는 루키 이지영이 우승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그 이듬해 타이틀스폰서를 바꿔 열린 LPGA 코오롱-하나은행 챔피언십에서 홍진주가우승하며 미국으로 진출했다.
2005년 국내 무대에선 박희영, 최나연 같은 스타들이 탄생하면서 투어의 인기를 이끌었고안선주, 지은희, 홍란 등이 선배들의 빈자리를 채웠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선수가바로 신지애다.
2005년 만 17세의 나이로 SK엔크린 인비테이셔널에 참가한 신지애는 쟁쟁한 선배 프로들을 제치고 아마추어 신분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신지애는 프로 데뷔 첫 해인 2006년 시즌 3승을 거두며 그 해 대상시상식에서 대상, 신인상, 상금왕, 다승왕, 최저타수상 등 5개의 상을 휩쓸며 일약 스타로 우뚝 섰다. 신지애는2007년 시즌 9승을 거두며 최단 기간 생애 총상금 10억원을 돌파하는 등 기존 선배들이 세웠던 많은 기록들을 하나씩 허물어 가며 한국 골프계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신지애는 KLPGA 정규투어 20승에 해외 투어 30승을 거둔 엄청난 기록을 갖고 있다. 지금도 JLPGA 투어에서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박인비는 2008년 US여자오픈에서 우승한 이후 지금까지 미국 LPGA 19승, JLPGA 4승, LET(여자유러피언 투어) 1승을 했고 2016년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2013년엔 LPGA투어 메이저대회 3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올 5월 20일엔 춘천 라데나골프장에서 열린 KLPGA 정규투어 ‘2018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박인비는 박세리와 함께 미국 L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한국의 자랑스런 여자 골프선수이기도 하다.
이밖에도 전인지는 KLPGA 정규투어 10승에 한국과 일본, 미국의 내셔널타이틀이 걸린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박성현은 KLPGA 정규투어 10승에 미국 LPGA 투어 3승을 기록 중이다. 박성현은 작년 신인으로 미국 LPGA투어 ‘올해의 선수상’과 ‘신인상’을 함께 받았다. 올해의 선수상은 유소연과 공동 수상이었다.
일본에선 전미정이 JLPGA 투어 25회 우승, 안선주가 24회 우승하는 기록을 세워가고 z다. 안선주는 KLPGA 정규투어 7회 우승하고 2010년부터 일본으로 진출했다.
이보미는 KLPGA 투어 4회 우승한데 이어 JLPGA 투어에서 21승을 올렸다. 고우순은KLPGA 17승, JLPGA6승, 미국 LPGA 2승을 올렸다.
안선주와 이보미, 전미정, 고우순은 각각 KLPGA 명예의 전당 후보자다. 명예의 전당에 오르려면 투어 경력 10년, 만 40세 이상, 포인트 100점 달성 등 여러 조건이 있는데 안선주는현재 98P, 이보미는 95P, 전미정은 93P, 고우순은 92P다.

 

KLPGA, beyond KOREA!
KLPGA는 창립 40주년을 맞아 한국을 넘어 세계로 도약하는 KLPGA가 되겠다는 의지를 담은 '비전 2028'을 선포했다. 이를 위해 KLPGA는 조직 체계의 지속적인혁신, 대회 경쟁력의 강화, 글로벌 파트너십의 강화, 사회적 책임의 실현이라는 4대 전략을 수립하고 2021년에는 아시아 골프 허브로 2025년에는 세계 2대 투어로 그리고 2028년에는 글로벌 넘버원 투어로 나가겠다는 단계적인 발전 방안을 제시했다.
KLPGA는 그동안 국내 투어의 규모와 수준을 정비해가는 한편 글로벌 시대 속에서 세계적인 투어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도 멈추지 않았다. KLPGA 김상열 회장은 "지금까지 40년간KLPGA가 쌓아온 전통과 경험을 통해 향후 진정한 글로벌 넘버원 투어로 자리매김하겠다."며 각오를 밝혔다.

 

 

<월간 골프가이드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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