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방제일 기자
박정희 前 대통령은 5·16 군사정변 이전까지만 해도 골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시 대부분의 국군 장성들이 주한 유엔군이나 대사관 사람들과 어울려 골프를 치고 파티도 곧잘 즐겼으나 박정희 소장은 이런 자리에 끼기를 싫어했다. 5·16이 일어났을 때 그가 골프 못 치는 유일한 장군이며, 미국식 애칭의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이 뉴스가 될 정도였다. 어쩌다가 마지못해 파티에 참석했을 때도 박정희는 홀로 한쪽 구석에서 술만 마시다가 시시덕거리는 다른 한국 장성들을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보고는 먼저 자리를 빠져나오곤 했다고 한다. 그러던 박정희 前 대통령이 5·16 군사정변 후로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된다. 1962년 최고회의 의장 시절 한장상 프로에게서 골프 레슨을 받아 골프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후 박정희 前 대통령은 스트레스가 쌓여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으면 능동 서울CC로 달려가 골프를 즐겼다. 그가 골프를 시작하면서 서울, 한양, 뉴코리아, 안양, 태릉 등의 컨트리클럽들이 문을 열었다. 박정희 前 대통령 시절 20여 개의 골프장이 개장했다고 하니 한국 골프의 초석을 닦은 이라 할 수 있다.
골프치지 못했던 유일한 장군,
5·16 군사정변 이후는 ‘골프광’
5·16군사정변 전까지 한국군 장성 중에서 유일하게 골프를 즐기지 못하는 장군이었다. 당시 박정희 장군을 제외한 다른 장성들은 골프와 테니스를 비롯해 포커, 파티 등을 통해 사교 모임을 가지며 미군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정치 군인으로 로비와 부정부패, 진급의 특혜를 받은 이들에 비해 박정희는 골프도 잘 치지 못했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인해 소외됐다. 파티에 참석해서도 그저 술만 마시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前 대통령은 어렸을 때부터 과묵하고 신중한 성격이었을 뿐 아니라, 좌익전력이 있었고, 군을 비롯한 정치계에 다른 연줄이 없었기에 소장에서 중장 계급으로 더 이상 진급이 어려울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 장성들이 미군들과 시시덕 거리는 모습이나 아부하는 모습, 골프를 치러 다니면서 진급하는 모습에 회의감을 느낀 박정희 前 대통령은 당시 자신의 휘하에 있던 군인들과 ‘부정부패 일소’라는 명목하에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는다.
1962년,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하다
박정희 前 대통령이 본격적으로 골프를 시작한 것은 5·16 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되고 난 1962년부터다. ‘외교를 위해 골프가 필요하다’는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 골프를 시작한 박정희 前 대통령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최고의 프로골퍼로 활약했던 한장상 프로에게 골프를 배웠다. 한장상 프로는 1962년 육군에 입대했고, 이등병 계급이었다. 박정희 前 대통령이 골프를 본격적으로 접한다고 하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김종오 장군이 한장상을 수소문해 박정희 前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한장상 프로는 먼저 목수들을 불러 장충동 국회의장 공관에 폭 10미터, 길이 15미터의 작은 연습장을 개설했다. 당시 박정희 前 대통령은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었고 그가 있던 곳이 현재 장충동 국회의장 공관에 골프 연습장을 지은 것이다. 박정희 前 대통령은 한장상 프로의 조언에 따라 골프를 충실히 배웠다. 한장상 프로에게 “서있는 공을 맞히는게 왜 이렇게 쉽지 않지”라고 말하며 연습을 했다고 한다. 박정희 前 대통령이 사용했던 클럽은 스팔딩(Spalding)이었다. 레슨을 받는 도중 “외교사절을 만나야 한다”는 비서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자리를 이동했다. 그러고는 한동안 골프를 칠 여유가 없었다.
1963년, 대통령이 된 이후 골프채를 다시 잡다
5·16 군산정변 이후 민정 이양의 격랑이 심화됐고, 1962년 12월 대통령제로 권력 구조를 바꾸는 개헌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이후 선거 정국에 들어가 1963년 10월 15일 제 5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윤보선 민정당 후보와 접전을 벌인 박정희 前 대통령은 단 1.5% 차이로 간신히 승리해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이 된 후 다시 골프 클럽을 잡은 박정희 前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조금씩 연습을 했고, 1964년 가을 서울 C.C에서 머리를 올렸다. 첫 번째 홀 티잉그라운드에서 티샷을 했는데, 슬라이스가 나버렸다. 생애 첫 샷이 제대로 안 된 것이다. 두 번째 샷은 ‘189’야드 정도 날아갔다. 샷을 하고는 골프채를 메고 갔다. 이런 습관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군 시절 총을 메고 다니던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한장상 프로는 첫 라운드에 동행하면서 레슨을 해줬다. 그립도 봐주고 자세도 잡아줬다. 그러다가 경호원에게 "너무 가까이 가지 마라"는 주의를 받기도 했다. 한장상 프로는 “너무 세게 치려하면 안 된다”고 조언을 해줬다. 그러자 "한 프로는 빨리 치면서 왜 나에게는 천천히 치라는 거요"하고 농을 건네기도 했다.
박정희 前 대통령은 골프를 늦게 배웠지만 열성을 다해 배웠다. 기회가 되면 서울 C.C로 나와 골프를 쳤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라운드를 했다. 골프장을 걸으면서 “푸른 잔디를 걸으니까 좋구만”을 연발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골프장도 많이 개장했다. 한양, 뉴코리아, 안양, 태릉 컨트리클럽 등 20여 개의 골프장이 박정희 前 대통령 임기 동안 개장했다. 이 중 박정희 前 대통령이 자주 가는 골프장의 모든 직원은 신원 조회를 철저히 받아야만 했다.
박정희 前가 대통령이 한번 골프를 치면 수많은 사람들이 골프장을 방문했다. 경호원뿐만 아니라 비서진, 운전기사 등 모두 합치면 50명 정도 됐다. 서울 C.C처럼 사단법인 형태로 운영되던 골프장은 어디서 따로 자금이 들어올 곳이 없어 골프장 자체에서 이익을 내야 했다. 하지만 정부, 검찰, 법원, 군의 고위 관계자들에게 회원 대우를 해주고 있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많은 식구까지 데려와 식당을 이용했으니 골프장 경영이 악화됐다. 이런 비용을 댄 사람이 김성곤 회장이었다. 김성곤 회장은 젊은 시절 사업으로 성공해 1962년에는 쌍용양회를 세웠고, 1963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활동하면서 1962년부터는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을 맡아 재정문제를 책임지고 있었다. 함께 정치활동을 하던 주변의 국회의원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 前 대통령은 1968년 골프를 하면서 시야를 넓히라는 의미에서 대법관 전원에게 골프 클럽을 선물하기도 했다. 이 해 민복기가 대법원장에 취임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도 있었다. 민복기는 일제강점기부터 판사를 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형을 내려 친일 인사로 비판받은 인물이다. 민복기는 1954년 서울 C.C가 복원되면서 골프를 시작해 골프마니아가 됐다.
서울대가 관악산 자락으로 가게 된 까닭은?
현재 서울대학교가 위치한 자리는 본래 관악 C.C가 있던 자리였다. 박정희 前 대통령 시절 관악 C.C를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고(현재 리베라C.C), 서울대학교를 그 자리로 이전했다. 이 이전에 대해 공식적인 명목은 기존 서울대학교의 시설이 낙후했기 때문에 새로운 위치와 건물에서 보다 좋은 연구 환경 조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서울대학교의 학생들이 유신 반대 시위를 거세게 하니 그것이 부담스럽고 싫어 청와대에서 멀리 떨어진 관악산 자락으로 이전시켰다는 후문이 있다. 이 후문이 조금 더 힘을 얻는 역사적 사실 중 하나는 서울대학교가 이전한 것이 1975년이고, 유신 반대 학생 시위가 10월 유신 1주년을 맞은 1973년 10월 시작해 이후까지 계속됐다는 점이다.
박정희 前 대통령의 골프와 정치 스타일
박정희 前 대통령의 핸디캡은 18정도였고,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서서 치는 스타일이었다. 거리가 많이 나지는 않았지만, 정확한 샷을 추구했다. 그리고 연습보다는 라운드를 즐겼고, 라운드 도중 레슨 받는 것을 좋아했다. 박정희 前 대통령은 9홀을 하는 때가 많았고, 끝나면 막걸리를 즐겼다. 때로는 라운드 도중에도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마시기도 했다.
실제로 클럽하우스 식당의 직원이 막걸리통을 들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따라서 박정희 前 대통령의 골프를 한 마디로 지칭해 ‘막걸리 골프’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막걸리 골프’ 외에도 박정희 前 대통령의 골프 스타일은 자신의 정치 스타일과 유사하게 닮아 있다. 먼저 경호상의 이유로 박정희 前 대통령이 골프장을 방문할 때 그 하루는 온전히 박정희 前 대통령의 것이었다. 그 뿐 아니라 골프의 룰보다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골프를 즐겼다. 티샷 세 개를 치면서 공이 옆으로 빠지거나 하면 다시 치기도 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 前 대통령은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자였기에 그가 골프를 어떻게 치건 그 누구도 간섭하기 어려웠다.
박정희 前 대통령의 골프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 중 대표적인 것이 그린에 올라가면 퍼팅을 딱 한 번만 하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골프는 다 좋은데 말이야. 퍼팅을 할 때 머리를 숙여서 몸에 부담이 되는 데다 신경이 쓰여 안 좋아. 스트레스를 풀러 와서 스트레스가 쌓이면 되나?”
박정희 前 대통령이 골프를 즐기다보니, 그 당시 힘 좀 쓰거나 돈 깨나 있다는 사람들도 덩달아 골프마니아가 됐다. 따라서 골프장은 상류층이 모이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자 사교클럽이 됐다. 이 당시 형성된 골프 문화와 골프에 대한 이미지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뿌리깊게 남아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박정희 대통령 덕을 봤거나 보려는 사람들이니 박정희 前 대통령의 신화가 창조된 공간 중 하나로 골프장을 들 수 있다.
박정희 前 대통령은 골프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골프를 정치적 전략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골프를 활성화한 측면도 있다. 특히 군인들에게 골프를 권장했다.
1966년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인데도 사관학교 생도들을 위해 태릉 골프장을 만들었다. 태릉 골프장은 국내 에서 세 번째 개장한 골프장이다. 서울 인근 군부대의 일반 사병들을 동원해 땅 파고 밀고 잔디 심으면서 지었다. 이후 1970년부터는 군의 사기 앙양을 위해 대통령배 각 군 대항 골프대회까지 시작됐다. 당시 정치적 상황에 따라 군인들이 너나 나나 가릴 것 없이 지휘봉 대신 골프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미래 한국을 이끌고 나갈 인재들은 국제적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골프를 알아야 한다는 게 골프장 건설 이유였다. 하지만 그보다는 쿠데타로 정권을 세운 박정희 전 대통령이 또다른 군사 쿠데타를 막기 위해 군인들을 자기편으로 안전하게 묶어두기 위해서는 뭔가 당근이 필요했다. 그리고 골프가 그 당근이자 ‘어른들의 놀이터’로 제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골프를 통해 군인, 정치인, 사업가 등 우리 사회 특권세력이 함께 어울리며 우정을 쌓게 되고 단합을 과시하게 된다. 박정희 前 대통령으로서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권력 기반이 강화되는 것이다. 골프는 박정희 前대통령과 지지세력 사이에서 일종의 ‘아비투스’였던 셈이다.
<월간 골프가이드 2016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