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그때 그 선수들
한은혜 2018-03-03 18:49:19

현재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프로 골프계는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를 맞고 있다. 오래 도록 꾸준히 활약하는 선수와 신성들이 조화를 이룬 결과다. 이런 춘추전국시대가 반갑기도 하지만 타이거 우즈와 같이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이는 선수가 보이지 않는 점은 아쉽기도 하다. 골프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추앙받는 우즈지만 이제 그 의 기량은 예전같지 못하다.그가 앞으로 또 우승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를 아끼는 팬들을 우즈가 하루빨리 정상에 복귀한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한때 골프계를 호령하거나 혜성처럼 등장했다사라졌거나 빛바랜 골프 선수들을 알아보자. Editor 방제일사진골프가이드 DB

 

 

이안 베이커 핀치 Ian Baker Finch  1989년 PGA 투어 콜로 니얼에서 우승했고, 1991년 디 오픈 3라운드와 4라운드에서 각각 64 타와 66타를 몰아치는 압도적은 성적을 거뒀다. 당시 퍼트를 가장 잘 하는 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이안 베이 커 핀치를 꼽을 수 있었다.

 

그가 사라진 이유는 드라이버 입스 때문이다. 골프선수들에게 부상이나 슬럼프보다도 두려운 것이 ‘입스 (Yips)’라 전해진다. 입스란 쉽게 말해 강박으로 인해 정상적인 스윙을 못하 는 상태를 말한다. 드라이버 입스 뿐 아니라 퍼트 입스, 어프로치 입스 등 종류도 다양하다. 핀치뿐 아니라 입 스로 인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선 수는 많다. 다만 그들이 이렇다 할 활 약을 못 보였기에 언급되지 않는 것뿐 이다. 흔히 멘탈 스포츠라 불리는 골 프에서 ‘입스’에 빠진다는 것은 사망 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핀치는 1997년 디 오픈 1라운드에서 92타를 치고 골프계와 영원히 담을 쌓았다 이 대회에서 기권한 뒤 라커 룸에서 펑펑 울었다는 후문이 전해 진다.

 

이제는 아는 사람만 아는 추억의 이 름이 돼버린 핀치다.

 

 

데이비드 듀발 David DUVAL  한때 우즈를 제압하고 세계 랭킹 1위 에 오른 이가 있었다. 바로 데이비드 듀발이다. 그는 세계 골프계에 혜성처 럼 등장했다. 1997년부터 2001년까 지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골퍼였으 며, 그가 디 오픈에 우승할 당시 언론 에서는 킹 데이비스라고 추앙했다. 이 후 6년 동안 불꽃같은 전성기를 보낸 듀발은 디 오픈 우승과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을 포함해 통산 13승을 거뒀 다. 이 외에도 듀발은 ‘꿈의 59타’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래서 매 그의 기록 에 도전하는 이들로 인해 언론에 그의 이름이 몇번씩 오르내리기도 한다. 이 런 그가 사라진 이유는 우즈와 같은 허리 부상으로 알려져 있다. 잘 발달 된 상체와 유연성이 뛰어난 허리가 부 상을 자초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했 다. 지나치게 허리를 회전시킨 것이 허 리는 물론 어깨, 팔꿈치, 무릎, 손목 등의 부상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자신 의 최대 무기로 인해 망가졌다는 인생 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그가 골프를 접 게 된 속 사정은 조금 더 인간적이다. 데이비드 듀발은 철석같이 믿었던 애 인의 불륜 행각으로 인해 극도의 우울증에 빠진다. 어렸을 적 듀발이 자신 의 골수까지 이식해 준 형 브렌트는 12세에 세상을 떠났다. 부모 이혼까 지 경험했다. 이 산전수전의 골퍼는 애인의 배반으로 인해 결국 삶의 의 욕 자체를 잃어버렸다. 추후 방황 끝 에 세 아이를 둔 싱글 맘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지만, 이미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된 이후였다. 골퍼의 신 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다. 현재도 종 종 대회에 참가하려 노력하지만, 과 거의 영화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골프해설가로 방송가에 데뷔한 만큼 그가 방송 쪽에서 두각을 나타내길 기대해 본다.

 

 

조니 맥더못 Johnny Mcdermott  1911년 미국인 최초로 US오픈을 제 패한 이가 있었다. 당시 골프계는 영 국 천하였다. 미국에서는 개최되는 US오픈도 다르지 않았다. 이런 시기 에 미국인 최초의 US오픈을 우승한 이가 조니 맥더못이다. 그다음 해에도 그는 디펜딩 챔피언으로 타이틀 방어 에 성공한다. 당시 나이 22세의 젊고 전도 유망한 선수였다. 언론과 골프 팬들은 맥더못이 미국의 등불이자 희 망이 될 줄 알았다. 이런 맥더못의 선 수 경력은 이듬 해인 1913년 23세의 나이로 끝났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그 후 남은 삶을 정신질환으로 인해 병 원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초년의 성공 (成功), 중년의 상처(喪妻), 노년의 빈곤 (貧困)을 항시 조심하라는 인생의 격언 이 다시금 가슴에 와 닿는다.

 

 

랄프 걸달 Ralph Guldahl  생소하고 낯선 이름일 것이다. 솔직히 이 글을 쓰는 나도 그에 대해 자세히 알 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랄프 걸달이 활약한 시대는 벤 호건과 바이런 넬슨, 샘 스니드 등 골든 트로이카가 활동했 던 1930년대다. 골든 트로이카 시대에 걸달은 마스터스 2승과 US오픈 1승 등 메이저 3승을 수확할 만큼 화려한 시절을 보낸 골프다. 당시 메이저급 대우 를 받던 웨스턴 오픈 3연승 등 통산 16 승을 쓸어 담았다. 조금 더 활약했다면 골든 트로이카와 어깨를 나란히 했을 지도 모를 만큼 걸출한 골퍼였다는게 골프 사가들의 증언이다. 걸달이 이 사 라진 골프 전설에 언급되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가 골프계를 왜, 무슨 일로 떠났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1942년 갑자기 투어를 떠난 걸달은 텍 사스 주 댈러스에서 자동차를 팔기도 했다는 후문이 들린다. 감정을 완벽하 게 조절할 줄 알았던 냉철한 골퍼라고 평가받던 걸달은 왜 사라졌을까? 여전 히 미스터리다.

 

 

빌 로저스 Bill Rogers  1981년 디 오픈 우승자, 빌 로저 스. 그는 그 해에만 PGA 투어 4 승을 포함 전 세계를 돌아다니 면 7승을 수확했다. 1980년대 골프계의 포문을 화려하게 장식 한 로저스는 이후 단 1승을 추 가한 채 투어에서 사라진다. 최 고의 해를 보냈던 1981년 거액 의 초청료를 받으며 전 세계를 누볐던 슈퍼스타, 부르는 것이 곧 몸값이던 골퍼는 결국 과유 불급(過猶不及)이라는 단어를 상기하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 로 사라졌다.

 

 

청야니 Yani Tseng  이제 익숙한 이름이 등장했다. 2008년부 터 2012년까지 LPGA는 그야말로 청야니 세상이었다. 2011년 브리티스 여자오픈에 서 청야니는 22세의 나이로 우승을 차지 했다. 그뿐 아니다. 청야니는 남녀 불문하 고 최연소 메이저 통산 5승의 위업을 달성 한다. 당시 골프 팬들의 시선은 모두 청야 니를 향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2012년에는 초반 3연승을 차지하며 비로소 청야니가 골프 여제로 가는 수순 을 밟는 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다음 6개 대회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후 청야니는 ‘컷 오프’를 당하는 등 갑작스럽 게 슬럼프를 겪었다. 역사를 쓰고 있는 최 연소 골프에게 있을 법한 일시적 압박감인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왕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내팽개쳤다. 그 후 지난 오늘날까지 청야니는 추억의 이름이 되었다. 아직 26세이니 부활할 수 있다고 혹자는 말한다. 헛된 희망이다. 청야니보 다 어리고 강력한 선수를 지금 당장 20명 이상 언급할 수 있다. 청야니를 비판하려 는 것이 아니다.

 

단지 ‘왕관의 무게’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 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는 결국 그 무게 를 견뎌야 한다. 청야니는 왕관의 무게 를 견디지 못했다.

 

 

김하진 Anthony Kim   PGA 투어 통산 3승을 거 두고 한때 세계 랭킹 6위에 까지 오른 재미교포가 있 었다. 바로 앤서니 김이다. 호쾌한 장타와 한국계 미국인 이라는 점 때문에 한국에도 수많은 팬들이 있었다. 앤서니 김은 행보도 개성 넘쳤다. 주먹만 한 허리 버클에 자신의 이 름 약자인 ‘AK’를 다이아몬드로 새겨 넣 었다. 지금은 리키 파울러가 자주 써 화제 인 일자 챙 모자도 원조는 앤서니 김이었 다. 당돌한 면까지 있었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우즈를 넘는 것이 목표라는 포 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를 호랑 이 잡을 사자, ‘라이언’ 앤서니 김이라고 말 하고 다녔다. PGA 투어도 화제를 몰고 다 니던 앤서니 김에게 큰 기대감을 나타냈 다. 그런 그에게도 부상의 그림자가 드리 웠다. 2012년 5월 앤서니 김은 왼팔 힘줄 에 생긴 염증으로 인해 그해 정규 시즌을 접기로 발표했다. 그 후 그는 지금 까지 필드 어느 곳에서도 그의 그림자도 찾 아볼 수 없었다. 소 문은 무성했다. 100 억 원에 달하는 부상 보 험금으로 인해 투어에 복귀 안 하는 것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반론도 있 었다. 투어에 복귀한다면 더 많은 명성과 부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보험금 때문에 복 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 이다. 계속해서 언론을 피해왔던 앤서니 김이 결국 지난 2015년 자신의 근황을 AP 통신에 밝혔다. 그는 골프는 좋은 추 억이었다고 밝히며, 투어 복귀에 비관적으 로 말했다. 그러면서 보험금에 대한 입장 도 내놓았다. 돈 때문이 아닌 삶 때문에 골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앤서니 김 의 말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그가 아닌 이상 모른다. 단지 앤서니 김은 선택을 한 것뿐이다.

 

<월간 골프가이드 2018년 3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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