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종학(Johnny Lee)
장엄하게 또 느릿느릿하게 시작하는 가운데, 강력한 힘으로 쭉 긁고 나오는 바이올린의 존재가 특별하다. 두툼한 톤이면서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따라서 악단 전체를 확고하게 끌고 나간다. 이런 음을 들으면 그냥 첫눈에 반하는 미인을 보는 듯하다. 세련되고, 예의 바르며, 지성적인 미녀를 말이다.
탄노이는 항상 내 의식의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 몇 개의 모델을 쓴 적도 있고, 전체적인 음색이나 스타일이 익숙하지만, 신제품이 나오면 또 관심을 갖게 된다. 솔직히 시원시원하고, 빠른 반응을 추구하는 스피커를 즐기는 편이지만, 그 한편으로 탄노이에 대한 동경은 늘 갖고 있다. 어쩌면 자기와 상반된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하는 심리와 같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예전에 아는 애호가 집을 탐방해서, 5-60년대 탄노이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모니터 블랙과 레드를 시청한 적이 있었다. 깜짝 놀랐다. 전혀 막힘이 없고, 애매한 구석도 없다. 모든 음이 사실적이며 또 품격이 높았다. ‘아, 이게 진짜 탄노이구나!’ 실감했다. 바로 그 미덕을 최신에 다시 리바이벌했다. GR 시리즈가 그 대표적이다. 따라서 최근의 탄노이를 논할 때엔 GR 이전과 이후로 나눠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탄노이의 흑역사라 할 수 있는, 미국 점령의 시대, 그러니까 창업자가 은퇴하고 잠시 미국의 하만 카든에 속해 있을 때의 시기(1974~81년)를 다시 조명했다. 그 당시 대표작이 아덴을 중심으로 한, ABCDE 시리즈. HPD라는 새로운 동축형 타입의 드라이버를 개발하면서 차례차례 나온 것이다. 이번에 만난 이튼은 막내에 속하는 북셀프 타입이다. 참고로 이번에 나온 레거시 시리즈는 그중 에이스만 뽑아서 발표했다.
사실 당초 HPD 시리즈를 만들 때, 주안점으로 삼은 것이 ‘어떻게 하면 인클로저의 용적을 적게 하면서 풍부한 저역을 얻을 수 있을까’하는 부분이었다. 덕분에 안길이가 불과 25cm에 불과할 정도로 슬림하면서, 충분히 드라이버가 구동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미드레인지는 정확히 10인치 구경이고, 중간에 놓인 트위터는 알루미늄과 마그네슘 등이 골고루 섞인 복합 소재를 진동판으로 썼다. 거기에 동사 특유의 튤립 웨이브가이드를 설치한 점도 빼놓을 수 없다.
현재 이튼의 정확한 스펙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몇몇 리뷰를 접해보면, 저역은 약 40Hz까지 내려가고, 고역은 20kHz 이상을 커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정통적인 박스형 스타일로, 탄노이식 정공법으로 만든 제품이며, 사이즈 대비 상당한 광대역을 실현하고 있다. 한편 밑부분엔 에너지 컨트롤 패널이 있는데, 두 가지 방식이 제안되고 있다. 하나는 트레블 에너지이고, 또 하나는 트레블의 롤 오프. 전자는 +3.0~-3.0dB에서 선택할 수 있고, 후자는 +2.0~-6.0dB 사이에서 고를 수 있다. 고역의 양뿐 아니라, 리스닝 룸의 환경까지 고려한, 일종의 룸 어쿠스틱 기능을 함께 하고 있다.
본 기의 입력 감도는 89dB. 당연히 진공관 앰프와의 매칭이 우선 권장되지만, 경우에 따라 A클래스 방식의 TR도 좋다고 본다. 단순하지만 세련된 외관은 빅토리아 시대풍의 가구를 연상시키며, 개당 무게는 20kg이다. 꼭 전용 스탠드가 아니더라도, 일단 제대로 된 스탠드에 얹어서 사용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본 기는 가정용으로 출시되었지만, 스튜디오에서 사용하기에도 무리가 없다. 그 근거로, 무려 400W의 파워를 듬뿍 넣어도 충분히 견디는 내입력이다. 실제로 탄노이에선 스튜디오 모니터도 꾸준히 생산하고 있다. 그 내용이 본 기에도 적절히 투입되었음을 밝힌다.
정통적으로 탄노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프리스티지 시리즈에 집중된다. 모양도 근사하고, 크기도 적당하며, 특히 상급기인 웨스트민스터에 이르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그 멋진 자태에 혼을 빼앗기게 된다. 반면 레거시 시리즈는 좀 수수한 편이다. 이 또한 매력이 있다. 아마도 교수나 예술가의 서재에 어울릴 법한 포름이 아닐까 한다. 본 기의 시청을 위해 유니슨 리서치의 인티앰프 트라이오드 25를 동원했고, 소스기는 역시 동사의 유니코 CD 프리모를 사용했다.
첫 곡은 앙세르메 지휘,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중 행진. 일단 화사하고, 유려하다. 탄노이 특유의 중량감도 있지만, 비교적 반응이 빠르고, 전 대역의 일치감이 돋보인다. 오래 전 녹음이지만, 여기선 새로 녹음한 듯 신선하기만 하다. 역시 진공관과 좋은 매칭을 보인다.
이어서 짐머만 연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깊은 정적 속에 조용히 피어오르는 피아노의 타건. 점차 강하게 부각되는 사이, 수려한 오케스트라의 존재가 시청실을 감싼다. 투명하면서도 가늘거나, 힘이 없는 음이 아니다. 골격이 튼실하고, 피아노와 악단의 조화가 분명한 가운데, 감촉이 좋은 음이 나온다. 이런 음이라면 하루 종일 들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이스트라흐 연주, 브루흐의 스코틀랜드 환상곡. 장엄하게 또 느릿느릿하게 시작하는 가운데, 강력한 힘으로 쭉 긁고 나오는 바이올린의 존재가 특별하다. 두툼한 톤이면서 카리스마가 대단하다. 따라서 악단 전체를 확고하게 끌고 나간다. 이런 음을 들으면 그냥 첫눈에 반하는 미인을 보는 듯하다. 세련되고, 예의 바르며, 지성적인 미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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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8년 5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