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종학(Johnny Lee)
지금부터 1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사트리 회로로 오디오계에 잔잔한 충격을 안겨주던 바쿤에게 어느 프랑스 인에게서 문의가 들어왔다. 이 분은 우연히 바쿤의 제품을 듣고는 완전히 매료되어 가격불문, 제작자가 추구하는 최상의 기술을 투입해서 자신만의 앰프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 것이다.
사실 무슨 뜬금없는 소리일까 싶지만, 의외로 유럽에서는 이런 분들이 많다. 일례로 안네 소피 무터와 같은 경우, 바이올린을 중심으로 그녀만의 취향에 맞는 오디오를 쓰고 있다. 비엔나의 유명한 특주 오디오 전문가의 솜씨로 만들어진 것으로, 물론 이 제품은 세상에 단 한 대밖에 없다. 프랑스 귀족은 바로 그런 제품을 원했던 것이다.
당시 바쿤은 10W부터 300W까지 다양한 출력의 앰프가 있었지만 나가이 상은 혼신의 힘을 다해 본인이 생각하는 최상의 설계와 노하우, 그리고 최고의 부품을 투입한 앰프를 완성했다. 모노블록으로 만들어진 이 제품의 대당 무게가 거의 100kg에 육박했음에도 출력은 고작 10W에 불과했다. 당시 가격은 1천만엔.
아무튼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이 제품을 공수하기 위해 몇 개의 단위로 분해해서 비행기에 실어 보냈다. 참고로 이 프랑스 귀족이 살고 있는 성에는 방이 수십 개가 있는데 각 방마다 오디오 시스템이 각각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거의 미치광이 오디오파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제품이 들어오고 나서 대부분의 시간을 바쿤의 방에서 보냈다는 후문이다.
이윽고 10년이 지난 후, 나가이 상은 시험 삼아 제품 하나를 보낸다. “이것 좀 들어봐 주십시오.”라는 정중한 제안이었는데, 그 사이 갈고 닦은 실력이 충분히 투입되었으므로 일종의 자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후 그 귀족으로부터 이전의 특주 제품을 뛰어넘는 퍼포먼스라는 소식을 받았다고 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궁금증을 하나 갖게 된다. 대체 그 제품이 뭔가?
놀랍게도 그 모델은 이전에 필자도 리뷰를 한 적이 있는 스테레오 버전 AMP-5521이다. 출력은 여전히 그리 높지 않은 8Ω에 35W지만, 리뷰 당시 이글스톤웍스의 안드라를 훌륭하게 구동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 그 귀족의 입에서 함박웃음이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노 버전이다. 사실 그간 바쿤의 앰프들은 모노 버전이 여럿 있지만, 실제로 AMP-5521의 경우 회로 구상 단계에서부터 모노와 스테레오의 양립을 전제로 하고 회로를 설계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면 스테레오와 모노의 양수겸장이 뭐 그리 대단하냐 반문할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BTL 방식의 모노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디스토션을 최소화 하면서 안정적으로 출력을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냥 스펙에 맞게 한다면 무려 4배가 올라간다. 본 기의 경우, 스테레오가 35W를 내므로 BTL 모노로 전환하면 140W가 가능하다. 그렇다고 그대로 적용하면 될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디스토션(왜곡)과 안정성이다. 특히 나가이 상은 편집증적으로 디스토션 제로에 집착한다. 그래서 무수한 실험을 했더니 97W에 와서 디스토션 0%가 구현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모노 AMP-5521은 채널당 97W가 되었다. 한데 단순한 97W가 아님은 이미 스테레오기로 충분히 실력을 입증했으니 더 이상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사실 바쿤 하면 사트리(SATRI) 회로가 떠오르고, 이 방식의 장점에 대해 이미 많은 리뷰가 나온 상태다. 그러니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SATRI라는 명칭의 근원을 살펴보자.
25년쯤 전 동경에서 열리는 오디오 포럼에 새로 발명한 회로를 적용한 시제품 앰프를 들고 나갔는데 나가이 상은 가장 먼 구마모토에서 왔기 때문에 배려 차원에서 첫 번째로 시연을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소리를 들은 다른 참가자들은 시연을 포기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 시제품만 시연을 하였다고 한다.
새로 발명한 회로에 대한 설명을 하였는데 그 설명은 들은 참석자 중의 한 사람이 “그것은 깨달음이다.”라고 했다. 그러자 또 다른 참석자가 “그러면 SATORI군요.”라고 한 것이 SATRI 네이밍의 기원이라고 한다. 무언가 대단한 뜻이 내포된 이름은 아닌 것이다.
앰프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신호 전달의 충실도’와 ‘저 왜곡의 실현’이다. 그런데 이게 서로 복잡하게 엮여 있어서 어느 하나를 추구하면 다른 하나가 침해를 받는 등 그 해법을 얻기가 무척 까다롭다.
예를 들어 신호 경로를 짧게 하고 그 순수성을 보장하려고 하면 당연히 피드백을 걸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래프로 찍어보면 만족스런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신호의 입력과 출력을 X축과 Y축으로 하였을 때 그래프는 곡선이 되어버린다. 물리적으로 완벽한 소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탄한 주파수 특성을 얻기 위해 네거티브 피드백(NFB)을 걸게 된다. 원 신호에 되돌이 신호가 덧붙여지는 것이다. 그래프 자체는 딥과 피크가 없는 상태가 되지만 신호의 순수성이란 면은 이미 훼손되어 버린다. 대체 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포획할 방법이 없는가 모든 앰프 제작자가 고민하는 사이, 역사적인 사트리 회로가 출현한 것이다.
나가이 상은 SATRI 회로의 원리가 최초인지 확인해 보기 위하여 특허공보 5,000개를 탐독하였는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여럿 있지만 네거티브 피드백(NFB)을 하지 않고 저항만으로 증폭을 하는 개념은 전례가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획기적이고 선진적이며 그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기술인 것이다.
처음 사트리 회로가 고안된 것이 1989년. 그러니 2014년생인 본 작엔 무려 25년에 걸친 연구와 노력이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결코 허투루 볼 제품이 아닌 것이다. 그 사이에 얻는 노하우와 테크놀로지가 얼마나 다양하게 투입되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사실 앰프건 스피커건 오디오 설계자는 일종의 창작자 내지 예술가로 봐도 무방하다. 기본적으로 테크놀로지를 지향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이 기술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어느 정도의 기술적 완성도를 바탕으로 예술이 성립한다고 볼 때, 이런 테크놀로지의 발현을 통한 높은 완성도의 추구가 결국 음악성이라는 예술적 목표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쪽 분야의 설계자들을 보면 기인도 많고, 독특한 개성을 지닌 사람도 많다. 심하게 말하면, 오디오라는 것은 ‘천재 엔지니어들의 놀이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가이 상을 기인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범부는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나가이 상은 비즈(Beads), 드론 등 다양한 취미를 갖고 있는데, 이게 뭐 대충대충 시간 때우기가 아니다. 거의 프로페셔널한 단계의 경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역으로 오디오 제작에 있어서 중요한 자양분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일례로 나가이 상은 라이브 음악을 녹음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렇게 표현하면 대충 포터블 레코더를 갖고 클럽이나 공연장에서 녹음하는 정도라 상상하기 쉽다. 미안하지만 그 수준은 이미 예전에 졸업했다. 한때 전문적인 녹음 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프로용 음악을 녹음한 이력이 있을 정도로 이 분야에선 프로페셔널이다.
지금은 앰프 제조에 전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심각하게 몰두하지 않을 뿐이다. 그래도 본인이 직접 개발한 채널 디바이더, 사트리 회로를 투입하여 직접 제작한 마이크를 사용하여 연주회를 주도하고, 그 연주를 녹음하여 마스터링까지 직접 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오리지널 소스의 성격이나 특징을 파악하고, 이 음원을 앰프 제조 시 레퍼런스로 참조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고 있는 것이다.
이제 동사의 최신형이라고 할 수 있는 본 기의 특징 몇 가지를 소개한 후 시청 평으로 넘어가겠다. 우선 언급할 것이 구성된 회로는 기능별로 모듈화해서 상호 간섭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데에 있다. 당연히 정밀도가 올라가게 된다.
바이어스 터보 기술도 언급해야 한다. 기존의 제품들(2013년 이후의 MK3 버전)은 전원을 켜면 바이어스가 안정되는데 약 5분이 걸렸다. 진공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운 분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약 20초 안에 안정화가 이뤄진다.
R-코어를 이용한 전원 트랜스의 구축도 흥미롭다. 통상적으로 파워 앰프 하면 큼직한 토로이달 트랜스를 생각한다. 또 이게 달려 있어야 앰프 무게도 더 나가고 보기에도 믿음직스럽다. 트랜스의 무게는 섀시의 설계를 좌우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설 자속을 획기적으로 낮춘 고효율, 슈퍼 로우 노이즈의 R-코어 트랜스의 투입은 8kg의 경량 사이즈에서 놀라운 스피커 구동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특히 이 R-코어는 재질 또한 중요한데, 이 부분은 일본의 발명 업체가 갖고 있는 특허로서 오로지 여기서 만든 것만이 R-코어의 성능을 극대화시킨다. 당연히 이 제품을 쓰고 있다.
사실 본 기의 특징을 열거하고 그 제조법에 대해 언급하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여러 리뷰에서 언급된 바 있으므로 이제 시청 소감으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참고로 시청 기기 라인업을 보면 프리앰프와 DAC에 동사의 제품을 각각 동원했다. PRE-5410 MK3과 DAC-9730이 그것이다. 여기에 스피커는 이글스톤웍스 안드라 3 및 레거시의 위스퍼 HD를 각각 사용했다.
두 스피커 모두 구동이 쉽지 않고 제대로 된 밸런스를 구축하려면 사용자의 실력이 무척 중요한데, 막상 연결해놓고 보니 허무할 정도로 멋진 사운드가 연출되었다. 확실히 바쿤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우선 안드라 3로 그리모 연주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다. 과연 감촉이나 에너지가 남다르다. 스피커를 완전히 움켜쥐고 있으면서, 빠른 리스폰스로 저역을 처리하는 부분이 먼저 감지된다. 정말 리얼 타임으로 재생되는 느낌이다. 고역의 청량하면서, 아기자기한 뉘앙스를 다채롭게 펼치는 부분은 3극관 진공관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그리모의 터치가 깊고 영롱하며, 백업하는 오케스트라의 순간순간 어택해오는 기세도 남다르다. 풍부한 정보량과 높은 음악성. 그리모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어서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의 ‘You Look Good to Me’. 초반에 오른쪽 채널에서 활로 긋는 더블 베이스의 깊은 음향이 자연스럽게 연출되고 왼쪽 채널의 드럼과 가운데 놓인 피아노의 위치가 명확하다. 이윽고 본격 질주 시, 세 악기가 독립적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유기적으로 엮어서 흥겨운 앙상블을 구축하는데, 절로 어깨춤이 나올 정도다. 중간 중간 킥 드럼이 적절하게 터지면서 점차 힘이 붙는 피아노의 타건과 함께 멋지게 어우러지는데 절로 감탄이 나오고 말았다.
게이코 리의 ‘Night and Day’는, 그녀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일품이려니와, 배후에 깔리는, 다소 노스탤직하면서, 감상적인 브라스 앙상블이 곡에 깊이를 더해준다. 사실 여성 보컬이 매혹적으로 들리면서도 어느 정도의 사실성을 담보로 해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본 기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매우 인상적이다. 중간에 간략하게 나오는 트럼펫 솔로의 악센트로 감상에 더욱 몰두하게 한다. 완벽을 지향하는 정교한 테크놀로지는 결국 소스에 담긴 음악성을 화려하게 펼쳐 보이는 원동력인 것이다.
이어서 레거시 위스퍼 HD로 바꿔봤는데, 대형기에 필적하는 복잡한 스피커를 간단하게 제압한다. 시험 삼아 록을 주로 테스트한 바, 안드라 3과는 전혀 다른 개성이 연출된다. 피가 통하는 듯한 열기가 감지되고, 격렬하고 거친 부분도 사실적으로 튀어나온다. 즉, 스피커의 개성과 소스의 특징이 여실히 살아있는 것이다. 록과 재즈를 중점적으로 듣는 분들이 있다면 이 조합을 적극 추천하고 싶을 정도다.
모노블록으로 변신한 AMP-5521은 기회가 되면 반드시 들어보라 강권할 만큼 강력한 임팩트를 선사하고 있다.
수입원 바쿤매니아 (010)6239-1478 가격 1,198만원(모노), 599만원(스테레오)
실효 출력 97W(8Ω, 모노), 35W(8Ω, 스테레오) 입력 RCA×3, SATRI-LINK×2
<월간 오디오 201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