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종학(Johnny Lee)
몇 년 전의 일이다. DAC 개발을 위해 한참 연구하던 바쿤의 오너 나가이 상에게 반가운 손님이 왔다. 이른바 미스터 호(Mr. Ho)라고 부르는 분이 자발적으로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미스터 호는 어떤 분인가 하면, 이를테면 소니 디지털 카메라의 CCD를 개발한다거나 미쓰비시 자동차의 LCD 화면을 탄생시키는 등, 첨단 전자제품의 여러 분야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둔 분이다. 최근에는 소니의 OLED를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동시에 그 자신이 엄청난 오디오파일이어서 직접 앰프며 여러 기기를 제작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14년 전 바쿤을 알게 된 후, SATRI 회로의 오묘한 깊이에 매료되어, 나가이 상의 최고 찬미자 중의 한 명이 되었다. 바쿤을 일종의 종교 단체로 본다면(물론 가설이지만), 미스터 호는 장로급이라고나 할까? 그가 도움을 준 부분은 이번에 만난 DAC-9730의 USB 단에 관한 것이다. 일체의 누락이 없는 정보의 전송에 상당한 힘을 실어준 것이다. 여담이지만 AMP-5521 앰프에 투입된 바이어스 터보 기술도 미스터 호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바쿤으로서는 천군만마의 실력자를 알게 된 셈이다.
사실 바쿤 하면 SATRI 회로를 빼놓을 수 없는데, 그 근원이 바로 DAC 개발에 있다고 하면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야기는 지금부터 약 30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0년대 중반, 나가이 상은 최신 미디어인 CD를 어떻게 하든 LP 수준의 음이 되도록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특히, 이쪽 분야에서 지터라는 것이 최대 문제라는 것을 간파하고, 어떻게 하면 지터를 줄일 수 있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차에, 우츠노미아란 곳에 출장을 갔다가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흥미로운 책을 하나 발견한다. 불교 철학자와 뮤지션 류이치 사카모토의 대화집이었는데, 여기서 ‘지금’이라는 부분이 테마로 다뤄진다. 과연 지금이란 무엇인가? 불교 용어로는 찰나라고 하는데, 그것은 75분의 1초를 뜻한다. 하지만 뮤지션에게 지금은 1000분의 1초로 다가온다. 이 대목에서 나가이상의 생각이 이어진다. 그럼 과연 CD에서는? 당시 업계의 표준은 30나노세컨드 즉, 1억분의 3초였다. 이 부분에서 더욱 연구를 해본 결과, 획기적으로 지터를 제거하기 위해선 100피코세컨드, 즉 100억분의 1초 단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를 위해 디지털의 칩이나 크리스털 발진기 등 여러 부분에 걸쳐 문제가 제기되지만, 아날로그단에도 문제가 있다. 전통적인 전압 증폭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 스피드를 쫓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진공관으로는 어림도 없다. 다시 고민이 찾아왔다. 그러다 나가사키에 갈 일이 있어서, 페리의 갑판에 멍하니 서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득 깨달음이 왔다. 전압이 아닌 전류의 증폭에 논 피드백 회로! SATRI는 일본어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사토리’에서 나왔다.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한 용어인 것이다. 이 회로가 기반이 되어 앰프에까지 이른 셈이다. 참고로 SATRI 회로 자체의 편차는 거의 제로에 가깝다. 0.006%의 스펙을 갖고 있는데, 이 정도라면 컴퓨터에서조차 캐치하기 힘든 수준이다.
아무튼 그간 바쿤에서는 몇 개의 DAC를 개발한 바 있고, 최신 제품으로 이번에 만난 DAC-9730이 본 리뷰의 주인공이다. 사실 이번에 들은 것은 바쿤매니아 특주품으로, 오리지널기에서 몇 가지를 보완한 내용을 갖고 있다. 디지털 입력 신호의 경우 24비트/192kHz까지 커버한다. 누구는 384kHz까지 하면 어떨까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음원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또 DSD 포맷에 대해서도 회의적이다. 대부분 DoP 전송이며, 그 경우 24비트/192kHz와 큰 차이가 없다. 거기에 힘을 쏟느니, 다른 부분에 연구를 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결론인 것이다. 무척 합리적인 발상이라 본다.
본 기의 USB 입력단은 매우 귀중하다. 전술한 미스터 호의 도움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업계의 표준으로 해도 무방한 XMOS USB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맥이며 PC 모두에 자연스럽게 대응한다. 여기에 충실한 아날로그단의 구성까지 더한다면, 본 기의 가치는 음을 들어보기도 전에 충분히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사실 요즘 CD가 골칫덩어리긴 하다. 디지털 파일이 대세를 이루면서 스트리밍 서비스나 다운로드를 이용하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상당량의 CD를 모은 데다가, 양질의 플레이어까지 갖춘 상황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또 최신 리마스터링 사양으로 무장한 CD의 음은 아직도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 시청은 우선 저명한 M사와 G사의 CD 플레이어로 들어보고, 나중에 본 기를 연결해서 음이 얼마나 좋아지냐에 주안점을 뒀다. 성급하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단 갖고 있는 CD 플레이어를 처분하지 말고, 대신 본 기를 투입해서 CD쪽 음을 강화시키자는 것이다. 거기에 본 기는 PC 파이나 디지털 음원 대응의 솔루션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동시에 이쪽 분야도 커버가 가능하다. 그럼 처음에는 CD 플레이어로 듣고, 그 다음 본 기를 걸어서 어떻게 음이 달라지는지, 그 부분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처음 들은 것은 이작 펄만이 연주하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1악장. CDP로만 들으면 정보량도 많고, 해상력도 뛰어난 것 같지만, 어딘지 모르게 거칠다. 그리고 음 자체가 얇아서 팔랑팔랑한 느낌을 준다. 이윽고 DAC를 걸면 놀랄 만한 변화가 감지된다. 음의 계조 표현이라고 할까, 세밀한 부분에서 마이크로 다이내믹스가 풍부하게 살아난다. 적절한 살집도 느껴지고, 공간감이 확실해지며, 전체적으로 정리 정돈이 이뤄지고 있다. 그간 지휘자 없이 연주하다가 이제야 나타난 듯싶다.
이어서 크리스티안 치메르만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워낙 유명한 트랙이라 들으면 바로 알 수 있다. CDP 단품으로는 그냥 어수선하다. 피아노의 터치도 기계적이며, 악단과의 조화도 찾기 힘들다. 라흐마니노프의 낭만성은 어디에 갔단 말인가? 그러나 DAC를 걸면, 이제야 제대로 된 음악이 나온다. 서정적이고, 풍부하며 또 멜랑콜리하다. 피아노의 타건은 더없이 유려하고 또 치밀하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세세하게 포착된다. 오케스트라가 점차 진격해오며 폭발하는 모습도 일목요연하다. 이런 차이는 정말 놀랍기만 하다.
마들렌느 페이루의 ‘Dance Me to the End of Love’에서도 차이가 확연하다. DAC를 걸면, 악단과 보컬이 제자리를 잡은 가운데, 페이루만의 독특한 개성이 잘 살아난다. 뉘앙스가 풍부하고, 감칠맛이 있으며, 여운도 깊다. 전체 멤버들이 짜임새 있게, 오소독스한 앙상블을 전개해간다. 단품 CD 플레이어에서 들은 어수선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부분이 확 정리가 되었다. 선택은 분명해 보인다. 또 어지간한 케이블 값조차 되지 않는다는 점은 본 기의 또 다른 장점으로 다가온다.
● 수입원 바쿤매니아 (010)6239-1478
● 가격 수입원 문의
아날로그 출력 XLR×1(DAC-9730D), RCA×1, SATRI-LINK×1
● 디지털 입력 USB×1, Coaxial×1, Optical×1
● 디지털 입력 지원 24비트/192kHz
● 크기(WHD) 34.9×9.4×39.7cm
<월간 오디오 2016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