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승영
영화 사운드 디자이너이자 녹음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필자의 선배는 언제랄 것도 없이 고품격 힐링 음원 작업에 몰입하고 있었다. 본업은 대학교수인 이 분께서는 언젠가부터 대한민국의 산하의 자연을 녹음하기 시작했고, 파일들이 축적되어 가면서 품질은 높아지고 카테고리는 세분화되어 갔다(딱 영화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를 떠올리면 대략 그 모습이 싱크될 것이다). 필자가 처음 이 파일들을 시청한 이래 한동안은 음원이라는 개념으로 와 닿지가 않았다. 정확히는 그렇게 될 수가 없었다. 예능 프로그램의 짧은 배경음원으로나 쓰일 법한, 기승전결이 없는 이펙트 샘플러와 같은 이 음원들을 어떻게 시청해야 할지 당혹스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 토막토막 흩어진 음원에 익숙한 음악을 믹싱해서 시청해 보니 상황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음악도 음향도 같이 살아나면서 새로운 뉘앙스와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러고 보니 이 소리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연의 소리에 대한 ‘뻔한’ 선입관은 시청할 수 있는 형태로 변신을 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레퍼런스 음원으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요컨대 자연의 소리는 가장 보편적인 그룹들이 알고 있는 익숙한 음이라는 사실에서 레퍼런스의 의미를 갖는다. 바이올린 소리, 피아노 소리, 벨칸토 소프라노의 음성 등은 시청자가 상당 시간의 학습과 경험을 통해서 실제 소리에 대한 기준이 생긴다고 볼 때, 자연의 소리는 대중적으로 기준이 이미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람 소리, 새 소리, 비 소리가 실제와 같다 아니다 이런 판단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이 자연의 소리를 자연스럽게 재생하는 브랜드들을 분류하다 보니 일정한 패턴이 나타났고, 하이엔드에 이미 새로운 사조가 넓은 반경으로 자리를 잡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연주의적 하이엔드
오디오의 모니터와 튜닝은 주로 서양 악기 소리들을 기준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있다. 음향기기란 게 음악을 듣기 위해서 제작된 것이고 음악 장르별 역사를 헤아려보면 고전음악을 위한 도구로 좁혀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악기를 잘 재생하는 것만으로는 미덕이 불충분할 만큼 하이파이 오디오의 재생 장르는 광범위한 범위를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하이엔드 오디오에도 사조(思潮)라는 게 있다면 최근의 하이엔드로 올수록 그 스타일은 점점 ‘자연주의’에 가까워지거나 이미 그 정점을 통과하고 있다고 할 수 있어 보인다. 그 이전에 극렬한 사실주의 시절을 거쳐 온 결과이기도 하다. 사조의 전환기에 항상 그렇듯이 극단에 서 있던 사실주의의 폐단은 지나친 세부 묘사에 동반된 긴장감이나 자극적인 연예인 기질 등으로 나타났다.
아날로그가 르네상스를 맞이하고, 진공관 앰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으며, 디지털은 무한 샘플링에 도전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마치 시동이 켜져 있는지를 확인하기 힘든 전기 자동차의 엔진처럼 시청자를 저 자극의 자연 속에 앉혀 놓은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왜곡이란 존재하지 않고 인위적인 구조물이 존재하지 않는 천연의 한복판을 의미한다.
이전부터 필자의 생각, 그리고 종종 제품에 대한 표현으로서 바쿤의 제품은 어느 날 문득 보니 현재의 트렌드에 맞아떨어지고 있었다고 했다. 질풍노도와 사실주의 시절에 등장했던 바쿤은 당시에는 그리 눈에 띄지 못했었고, 멀리 있는 별에서 출발한 빛이 비로소 현재에 도달한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다른 브랜드들은 이전의 사운드로부터 새로운 스타일을 창안하는 과정에서 접어든 길에 오래전부터 반듯이 날아온 바쿤은 이미 진입하고 있게 된 것이다.
바쿤 사운드
바쿤의 사운드적 특징을 설명하는 말 중에서 ‘스트레스가 없는(Stressless)’이라는 말을 대신할 수 있는 표현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해상도가 뛰어나고 음원 속에 있는 정보를 낱낱이 보여주지만 힘이 실려서 옥죄거나 예리하게 되지 않고 순수한 입자들이 원본에 있는 정보를 고스란히 제공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다분히 ‘자연스럽다’는 막연함을 좀더 구체화시켜줄 것이다. 이런 음은 종종 전원부를 완벽에 가깝게 차폐시켜 노이즈를 차단한 상태이거나 입력에서부터 풀 밸런스 설계로 출력까지 전송을 한 경우에 경험한 바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제품들은 예외 없이 크고 육중한 섀시와 독립된 전원부를 둔 경우가 많아서 복잡한 구성과 배치, 그리고 부가적인 용품들을 필요로 했다. 그에 비하면 바쿤은 서운할 정도로 심플하고 존재감이 약해서 특히 처음 대하는 오디오파일들로부터 하이엔드적인 시선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바쿤의 자연주의적 사운드 콘셉트는 종종 기존 브랜드 중에서 유사한 경우를 떠올리게 했다. 예를 들어 투명하고 유연한 스트로크는 제프 롤랜드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100W급의 콘센트라와 같은 경우는 동일 카테고리의 SCA-7511 MK3과 좋은 비교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 스피커를 압도하고 장악해서 소리를 짜내지 않고 마치 스피커를 통과하면서 음이 만들어지는 듯한 아름다운 하모닉스와 결이 고운 질감은 특히 유사점이 많아 보인다. 또한 바쿤의 투명하고 적막한 배경은 욥(Job) 회로를 기반으로 했던 골드문트의 90년대 미메시스 시리즈와 유사한 느낌을 준다. 전원부의 용량이나 방식에 따른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명쾌하고 스피디한 드라이브의 스타일도 근본적으로 유사한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어 보인다. 또한 녹음과 연주에 따라서 흑백 사진과 같은 극명하고도 청초한 느낌을 들려줄 때는 300B와 같은 싱글 3극관의 독특한 하모닉스가 들려오기도 한다.
바쿤의 히스토리와 원리, 각 제품의 특성 등은 이미 개별적인 많은 언급이 있었기에 이전 자료를 참조하면 충분할 것으로 보인다. 스펙에 나와 있는 내용을 열거하기보다는 본 지면에서는 이 조합의 사운드적 품질과 몇 가지 조합에 따른 성향에 대해 부연하기로 한다.
세미 풀레인지 프로악 D48
이전의 시청으로부터 두 가지의 변화가 동시에 생겨났다. 프리앰프가 추가된 점과 모노블록 파워 앰프가 되었다는 점이 그렇다. 우선 순정 프리앰프의 조합은 어느 스피커와의 시청에서도 SCA-7511 MK3의 특징을 좀더 심화시킨 결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더욱 적막한 배경이 되었다는 점과 스피디해졌다는 점, 그리고 무대를 좀더 큰 사이즈로 선명하게 띄워 올리고 있어 보인다. 투명도는 원래의 상태에서 줄지 않은 수준이라고 하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유리를 두 겹으로 했지만 별로 의식할 수 없는 상태이다.
파워 앰프 쪽에서의 변화는 특히 출력이 높은 상위 버전들이 아니라 SCA-7511 MK3의 채널별 드라이빙으로 로딩 파워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동일한 음색으로 시청을 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스테레오 버전과의 차이점을 좀더 분명히 비교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같은 볼륨에서 음량이 늘어나거나 하지 않은 채로 몇 가지 변화가 생겨났다. 우선 스테이징이 더 구체적으로 떠오른다. 프리앰프의 효과와 비교해서 서로 얼마만큼의 기여가 되고 있는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무대를 더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덕목은 파워 앰프의 역할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되었다. SCA-7511 MK3 스테레오 버전이었을 경우에도 스테이징은 상당히 또렷한 편이었지만 본 조합에서는 사이즈가 늘어난 채로 작은 부분까지 밝게 묘사하는 수준이 되었다.
프로악의 D48 또한 대표적인 난제 중의 하나이다. 출력으로 제압하려면 과도한 울림이 생겨 넓은 공간이 필요하며, 드라이브가 부족하면 스테이징 자체가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시청 공간은 대략 가로가 6m, 세로가 10m 이상 되는 꽤 넓은 곳이어서 차라리 출력이 높은 쪽이 D48을 구사하기가 쉬운 공간이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21W 출력의 SCA-7511 MK3 모노블록이 만들어 내는 스테이징의 사이즈와 입체감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막연히 임피던스가 낮은 느린 저역에서 좀더 유리하겠거니 싶었던 수준을 넘어서는 퍼포먼스이다. 앞서 시청했던 네임 오디오나 심오디오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 적지 않은 차이가 발견된다. 이 둘에 비해서 중량감이나 위력이 실리는 느낌은 다소 약화되어 있는 대신 청량함과 말쑥한 음색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서 자극 없이 섬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임 오디오와 비교하자면 다소 매끄러운 질감이, 심오디오와 비교했을 때는 컴팩트한 음상이 부각되어 들렸다. 기본적으로 낮은 대역까지 쉽고 스피디하게 드라이브한다.
다프트 펑크의 ‘Get Lucky’를 들어보면, 도입부의 훵크 기타가 유난히 귀에 잘 들어온다. 음의 마무리에서 날카로움이나 자극이 느껴지지 않으면서도 단호함이 있다. 반대쪽에서는 경우에 따라서는 잘 들리지 않을 때도 많은 베이스가 낮은 대역에서 쿠르릉 대며 선명하게 드러나서 좋았다. 큰 울림이지만 단정하게 묘사한다. 짧은 순간 육중한 음압을 꽉 찬 밀도로 빠르게 드라이브한다. 중량감을 위주로 하는 스타일이 아님에도 저역에 해상도가 분명하게 그려지자 꽤나 위력적인 베이스를 들려준다. 이 업비트 훵키 리듬을 거칠거나 건조한 느낌 없이 잘 연출해서 전 대역이 조화를 이루며 운행하고 있다. D48의 육중한 베이스로 이 곡 고유의 섬세한 비트를 자극 없이 생기 있게 들려주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바쿤에서 일반적으로 짐작되기 쉬운 특성이 아니라서 더욱 그러했는데, 이 곡을 시청하면서 확실히 바쿤은 대형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바쿤은 자극적인 전자음에서도 이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구체적인 스테이징과 맑은 음색으로 신디사이저를 들려주었다. 역시 짐작만으로는 바쿤에서 예상되지 않는 품질이다. 장 미셸 자르가 연주하는 ‘Equinoxe Part Ⅳ’는 화려하고 큰 스케일로 무대를 채운다. 신디사이저의 운행을 약동하는 느낌으로 적극적으로 들려주지만 조금 다른 부분은 순도 높은 독특한 투명함이 느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특히 높은 대역 쪽에서 조합되는 여러 음들에서 시각적으로 화려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스피커 좌·우 폭을 훌쩍 넘어서는 스테이징이 쉽고 명쾌하게 떠오른다. D48을 통한 시청의 장점으로 보이는 이 내용을 통해 순간 장대하고 광활한 느낌을 안겨준다. 후반부 낮은 대역이 반복되는 구간에서는 위력적이면서도 분명한 베이스를 잘 들려준다.
현악기는 바쿤 앰프의 장기가 되는 부문 중의 하나이다. 특히 홀 톤이 있거나 녹음 장소에 대한 정보가 충분한 고음질 음원이라면 더욱 돋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장르이다. 대역이 넓지 않아서 드라이브의 부담은 적은 곡이지만 마치 미분을 하듯 공간 속으로 얼마나 구체적인 구간을 미세하게 표현하느냐가 관건이다. 파블로 베즈노시우크가 연주하는 바흐 소나타 1번 알레망드는 독주 현의 청초한 울림이 선명하게 전해진다. 촘촘하고 찰진 마찰음이 생생해서 마치 목소리의 울림과도 같은 표정이 느껴지는 듯했다. 본 녹음 고유의 바이올린 주변의 울림과 공기의 이동이 잘 느껴지며 입체감 있게 이미징이 떠오른다. 기본적으로 연주자 전후 간의 레이어링이 투명하고 맑게 떠올라서 탁 트인 공간에서의 전망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음색과 스테이징 등 특별히 흠을 잡을 곳이 없는 연주였다. D48과 같은 스펙의 캐비닛과 대역에서 울려나오는 솔로 악기의 품질은 과연 바쿤의 역량을 잘 드러내주는 대표적인 부분이다.
피아노의 연주에서도 석연치 않다거나 약화되는 경우가 없다. 아르헤리치와 레핀 커플이 연주하는 크로이처 3악장 도입부의 슬램을 들어보면 피아노의 타건 순간과 울림이 두터우면서도 매우 사실적이다. 빠른 패시지에서의 동작은 경쾌하고 순간 급강하하는 왼손의 위력이 드라마틱하게 연출된다. 작고 빠른 동작에서도 미세한 울림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바이올린 또한 표정이 분명하고 섬세하지만 풍부한 표정을 보여준다. 단정함 속에서도 고품질의 마이크로 다이내믹스를 들려준다. 바이올린의 울림이 다소 왜소한 듯한 경우가 있지만 심지가 분명하고 핵이 깊은 소리이다. 양감과 다이내믹스가 좀더 강화되었으면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D48과 함께 시청에는 오렌더의 X100과 심오디오의 650D를 통해 파일을 재생했으며, 케이블은 모두 네오복스의 제품을 사용했다. 소스와 프리앰프, 프리앰프와 파워 앰프와의 연결은 모두 전압 증폭단인 RCA 단자를 통해서 시청했다. 프리앰프의 볼륨은 5, 파워 앰프의 게인도 5로 맞추어 시청했다.
말쑥한 클래식 레퍼런스 LS3/5a
LS3/5a는 바쿤의 사용자들을 감안해 볼 때, 가장 관심이 많이 가는 스피커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사이즈로 작은 공간에서 이 조합을 시청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난 번 SCA-7511 MK3과 스펜더 LS3/5a의 시청은 상호보완적인 조합으로 작용해서 LS3/5a에서 미처 발견 못했던 덕목까지 들려주기도 했었다. 그래서 바쿤 SCA-7511 MK3이 이 고전 모니터의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다면 좀더 많은 오디오파일들에게 흥미로운 화제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LS3/5a에서는 프로악의 경우와는 조금 다른 결과들이 생겨났다. SCA-7511 MK3이 모노블록으로 드라이브를 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느껴지는 부분은 낮은 대역의 확장 느낌이다. 모노블록이라고 해서 베이스 유닛을 더 큰 폭으로 파워 핸들링하지는 않는다. 대신 낮은 대역으로 갈수록 이전에는 약하게 느껴지던 비트와 다이내믹스가 확실히 분명해져 있다.
이기 팝이 부르는 ‘In the Death Car’ 도입부의 베이스 비트가 좀더 분명한 구간을 그리면서 해상도가 늘어난 효과를 준다. 원래 이 스피커의 베이스는 이렇게 울리지 않지만 지난 번 스테레오 버전으로의 시청에서도 심도 깊고 절제된 베이스를 들려준 바 있다. 모노블록에서는 베이스의 울림이 커지지 않았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그려지며 적당한 양감으로 들리던 곳에서 탄력이 생겨나 있다. 그 효과로 스테이징의 사이즈가 다소 늘어난 듯한 느낌도 든다. 이기 팝의 보컬도 어딘가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어 보인다. 마임의 끝 부분이 적극적이라고나 할까? 더 분명하고 열심히 노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녹음이 잘된 보컬곡은 LS3/5a의 정수가 되는 부분이다. 대편성이나 합주와는 달리 특히 솔로 보컬의 경우 과도한 드라이브를 하면 분위기를 해치기 쉬운 미스 매칭의 전형이 되곤 한다. 출력을 늘리지 않은 채로 모노블록으로 구사하는 LS3/5a는 분명한 어조로 정교하고 섬세한 표현에 능하기도 하거니와 보컬 사이를 연주하는 악기들과 낮은 대역을 꿈틀대는 운행을 조화롭게 연출한다.
헤레베헤가 지휘하는 바흐의 B단조 미사 중 ‘Domine Deus’는 청순한 보컬을 들려준다. 이미징도 선명하고 위치도 잘 느껴진다. 입을 공명시켜 울리는 느낌이 선명하다. 소위 새김이 깊은 울림이다. 울림이 공간 속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모습도 잘 감지되어서 입체감이 고조된다. 옥타브가 이동하면서 느껴지는 그라데이션과 에너지의 변화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노이즈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깨끗한 배경은 빈 공간의 느낌을 분명히 해주었는데 이런 무대를 배경으로 떠오르는 보컬은 확실히 드라마틱한 효과를 고조시켰다.
피아노는 모노블록이 되면서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이는 부문이 아닐까 싶다. 스테레오 버전에 비해서 잘 통제되어 있다는 느낌이 분명하다. 레핀과 아르헤리치가 연주하는 크로이처 3악장은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연주를 손색없이 들려준다. 이전에 다소 아쉬웠던 부분이다. 양감이나 에너지가 강화된 것은 아니지만 왼손의 느낌도 더 구체적이다. 건반을 움직이는 동작이 좀더 밝게 보이는 듯하고 순간순간 하모닉스가 아름답게 피어났다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섬세한 울림의 구간이 잘 떠올라서 전 대역이 명쾌하게 동작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급격한 트랜지언트를 가진 대편성 코러스와 오케스트라를 들어보면 LS3/5a가 왜 오랜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그리고 앰프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설명해준다. 정명훈이 지휘한 바칼로프의 미사탱고 중 ‘Kyrie’에서의 순간 급격히 확장되는 코러스는 마치 큰 잎을 가진 꽃처럼 빠른 속도로 피어난다. 다소 어둡지만 촘촘한 밀도로 화려한 울림을 쉽고 명쾌하게 펼쳐낸다. 그 바닥을 물처럼 흐르는 듯한 베이스가 분명한 존재감으로 턱을 넘을 때마다 신호를 보내서 생동감이 생겨나 있다. 스테레오 버전에 비해 전 대역이 적극적인 동작을 보여주고 있다. 반도네온도 강렬해져 있고 첼로의 운행도 더 밀도 높은 느낌이다. 느린 템포에서도 전체 연주의 운행이 산만해지지 않고 집중력을 더하고 있어 보인다. 코러스와 여러 악기들이 촘촘한 음상들의 집합이 되어 잘 정돈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지만 화려함도 겸비하고 있어서 시청의 재미가 있다.
LS3/5a의 경우는 오포 105D를 킴버의 셀렉트 1020과 8TC로 연결해서 시청했다. 가급적 D48과 동일한 음원으로 시청하려 했으나 CD로 시청을 하게 되는 대신 이전 SCA-7511 MK3의 시청 시와 동일한 음원으로 비교를 하는 쪽이 더 의미가 있어 보였다.
프로젝트 시청의 마감
아직도 순정 조합의 경우의 수는 여전히 남아 있다. DAC를 통한 시청과 헤드폰 출력 등에 대한 테스트는 또 새로운 경우를 발견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몇 개월에 걸쳐 간헐적으로 바쿤에 대한 프로젝트성 시청을 한 듯하다. 우연치 않게 이런 방식이 되자 몇 가지 변화가 생겨났다. 무엇보다 출력에 대해 무관심해졌다. 큰 의미를 갖지도 않고 가끔 잊을 때가 있지만, SCA-7511 MK3 모노블록의 출력은 불과 21W이다.
그 다음으로 인티앰프와 파워 앰프의 경계가 불분명해졌다. 혼용되도록 제작되어 특유의 운용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프리앰프를 추가하거나 파워 앰프를 추가할 때마다 연주의 품질은 깊어지고 다채로워진다. 그리고 대상이 되는 스피커의 선택 폭도 넓어진다.
바쿤의 제품들은 회를 거듭할 때마다 신선하다. 마치 일상을 반복하느라 잊고 있던 들판에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벽에 막혀 있는 동안은 기능을 발휘 못하던 귀가 확장된 듯한 상쾌함이다. 여기에 더해서 무엇보다 듣는 재미가 있다는 점 또한 빠뜨릴 수 없다. 바쿤을 통해 짧은 테스트를 하는 횟수가 늘어감에 따라 필자는 20년 이상 시청해 왔던 익숙한 음원들을 새로 꺼내서 듣는 재미가 생겨났다. 기회가 되는 대로 바쿤을 통해서 설악산 중턱의 바람 소리를 들어봐야겠다. 참 특이하고도 소중한 감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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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5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