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오승영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EAR(Esoteric Audio Research)의 리메이크 신제품들이 속속 복귀하고 있었다. 굳이 EAR의 팬이 아니더라도 아날로그 애호가들에게 지속적인 인기를 누려왔던 834P의 새로운 디자인과 더불어 그 본편인 834 또한 오디오파일 앞에 와 있다. 834의 새로운 이름은 8L6, 제품명이 바뀐 게 아니고 2000년 초반에 발표된 오리지널 834를 플랫폼으로 해서 기본 포맷인 인티앰프로서는 물론이고, 프리앰프와 파워 앰프로도 각기 트랜스폼되도록 변신했다. 일반적인 프리 아웃, 파워 인 등 쓸 일도 별로 없이 단지 생색만 내는 부가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편리하고 안정적으로 사용하도록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제품이다.
EAR 8L6의 디자인은 동사의 프리앰프 및 인티앰프의 규범과도 같은 포맷에 따라 제작되었다. 타사의 제품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파라비치니 고유의 스타일이 살아 숨 쉬는 마치 작은 요새처럼 보인다. 디자인은 조정석과도 같은 전원 트랜스를 전면 패널 상단에 배치하고, 두 개의 출력 트랜스를 섀시의 뒤쪽 끝에 두어 삼각형 구도로 방점을 찍어놓은 구조를 하고 있다. 중앙에 마치 공원과 같은 공간이 생겨나 있어서, 뭔가 호젓하기도 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특히 좌우 각각 마치 투명 유리로 덮인 화원처럼 출력관을 덮고 있는 그릴 하우징의 디자인이 가장 큰 포인트가 되는데, 파라비치니에 따르면 이 디자인은 런던의 킹스 크로스(King's Cross) 기차역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킹스 크로스 역이라면 영화 <해리포터>에서 호그와트행 열차로 빨려 들어가는 관문 9와 3/4 승강장으로 유명한 바로 그곳이다.
거울 같은(어떤 면에서는 거울보다 더 선명하다) 특유의 크롬 도금 패널과 금속편 덩어리를 그대로 금도금한 두 개의 노브는 여전히 강렬하고 주장이 강한 EAR의 트레이드마크이다. 패널 우측 하단의 오렌지색 파워 푸시 버튼에 등이 들어오고, 킹스 크로스 역 정원의 불빛이 들어오면, 다른 제품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요새가 둥실 떠오른다. 파라비치니 스타일의 장관이다.
럭스만과 뮤지컬 피델리티, 알케미스트 오디오 등을 거친 파라비치니는 사실 진공관은 물론 솔리드스테이트에 대한 투철한 해석을 제작에 실행할 수 있는 멀티 엔지니어가 되어 있었다. 특히 그의 2000년대 초반 이래의 제품들은 진공관의 고유 성향에 솔리드스테이트의 스피드와 파워풀 드라이빙을 패치한 초월적 앰프들이 되어 있었다. V20과 834가 그 대표작이었고, 본 8L6은 그 2세대에 해당하는 트랜스포머라고 할 수 있다.
파라비치니 사운드의 핵심이 되는 자체 제작 트랜스포머와 순 A클래스 방식 증폭, 그리고 고유의 NFB를 최소한도로 걸리도록 제작한 것이 특징이다. 초단에 ECC83, 드라이브는 ECC85를 각기 두 개씩 사용해서 채널별로 4개씩의 EL34를 통해 최종 출력한다. 이 방식의 출력은 8Ω 기준으로 50W이다. 출력관은 셀프 바이어스 방식으로 스마트 컨트롤되며, 시청 제품은 EL34가 기본 장착되어 있는데, 6L6, KT66 등의 대표적인 5극관들과 호환된다.
뒷 패널의 양쪽 끝으로 프리 아웃 단자를 별도로 두었으며, 상단 패널의 뒤쪽 왼 편에 있는 토글 스위치로 프리단으로부터의 결선을 변경해서 쉽게 파워 앰프로 변환된다. 스피커 터미널을 상단에 수직으로 배치했는데, 산화를 방지하기 위해 연성 플라스틱 커버를 씌운 것은 좋으나 도크식으로 케이블을 홀에 삽입하는 방식이라서 처음엔 난감했다. 기본적으로 말굽형 단자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은 불편하다. 대신 바나나 핀 단자와 일반 선재를 꼬아서 넣고 잠그기에는 적당했다. 4Ω 및 8Ω 로딩 선택이 가능하다.
어디에도 설명을 찾을 수 없었지만, 특히 소리를 듣고 보니 필자가 알고 있는 파라비치니의 방식이라면 UL 접속(Ultra Linear) 방식으로 설계를 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즉, 출력 트랜스의 1차 권선을 출력관의 캐소드와 전극 모두에게 동일한 양의 전류가 흐르도록 설계해서 4극 모드로 작동하도록 한 구성일 것이다. 이 방식이라면 진공관의 음색에 솔리드스테이트의 드라이브가 접합된 파워와 스피드가 나온다. 또한 출력관을 커플링시켜 캐소드로부터의 로딩이 일부 피드백되는 선별 NFB 방식으로 디스토션을 낮추도록 제작되었다. 이미 셀프 바이어스 방식으로 제작되었지만, 이렇게 하면 진공관의 내구성에도 기여하는 바 크다. 참고로 외주를 의뢰받아 최근에 이런 방식으로 제작한 제품이 쿼드의 클래식 인티앰프이다. 출력의 차이와 기타 고유 스타일이 같을 수는 없지만, 이 둘의 사운드는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사라 맥라클란의 ‘Angel’ 도입부는 확실히 응집력과 힘이 실려 있었다. 필자의 쿼드 2-40은 울림의 반경, 그리고 스테이징이 좀더(그것도 아주 조금 정도) 넓게 그려진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본 인티앰프보다 결코 젊은 느낌이 없다. 힘이나 스피드, 맑은 눈망울 등 전반적으로 그렇다. 라인 마그네틱 앰프로의 시청 또한 청순한 느낌이어서 좋았지만, EAR은 거기에 힘을 더 실어주어 강렬한 콘트라스트가 더해져 있다. 라인 마그네틱보다 비장하고 쿼드보다 밀도가 높은 사운드이다. 도입부의 베이스는 선명한 해상도로 슬램을 치고 서서히 사라졌으며 배경의 몇 안 되는 악기들은 그리 두텁지 않은 레이어들이 되어 늘어서는 장면을 연출해서 쉽게 입체적인 무대를 연출했다. 어찌 보면 그래험 LS5/9와 잘 연상이 되지 않는 사운드라는 생각도 들었다.
머레이 페라이어가 연주하는 바흐의 영국 모음곡 2번 1악장 프렐류드는 진공관의 하모닉스와 솔리드스테이트의 스피드가 잘 결합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등간격 타건의 연속음에서 엄격한 절도와 동시에 밝고 맑은 하모닉스의 아름다움이 빛나고 있다. 시종 밝게 울리는 듯하지만 왼손에서 짧게 나타나고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짙은 음영이 만들어 내는 짧은 콘트라스트는 이 기계적인 연주가 ‘조화와 아름다움’을 설명해주는 데 좋은 지표가 될 것이다. 연주자의 모습과 시청 위치에서의 거리도 잘 떠올라서 명쾌하게 조망된다. 이런 순간 감상자의 눈앞에는 맑은 날 햇볕 가득한 홀의 스테이지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될 것만 같다.
마이스키와 아르헤리치 커플이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는 깔끔하면서도 서정적인 느낌이 자연스럽게 파고든다. 신파조로 흐르는 일이 없이 마치 지휘자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정확한 템포를 특징으로 해서 깔끔한 마무리를 연출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피아노 또한 그렇지만 첼로 고유의 울림이 모호한 하모닉스가 아닌 실제 홀을 채우는 음색과 어쿠스틱이 유사해서 사실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기본적으로 이 곡에서의 무대를 연출하는 품질이 상당히 하이엔드스럽다. 투명한 느낌이 생겨나서 두 개의 악기로 연주하지만 평면적이라는 느낌이 적고 정교한 사이즈의 입체적인 무대가 떠오른다. 특히 중역에서 높은 대역으로 이어지면서 울려오는 순간에서 그런 느낌은 좀더 고조된다. 고전 진공관에 비해 공기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의 해상력이 더해져서 뛰어난 스테이징과 음상을 그려낸다.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음색에 사실적인 묘사를 덧붙인 듯한 느낌이다.
정명훈 지휘의 ‘미사 탱고’에서의 약음에서 코러스가 확장되어가는 장면의 묘사가 상당히 극적으로 그려지면서 무대 위의 명암을 잘 묘사해주었다. 다른 곡과 달리 이 부분에서 특히 부각되는 점은 촘촘한 변화의 구간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인데, 종종 그라데이션과 마이크로 다이내믹스라는 표현으로 이 현상을 해석하고 표현하곤 하지만 과연 밤하늘에 별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긴밀한 밀도감, 대역 간 일치, 몸 속에서 번져 나오는 온기감 등이 본 곡 특유의 대편성 코러스와 연주를 명쾌하게 풀어내는 분해력과 결합해서 종합적인 감동을 이끌어 냈다. 시청한 두 개의 스피커 중에서 그래험의 LS5/9 쪽이 이 곡의 연출에 좀더 기여를 했지만, 이 곡은 역시 좀더 큰 스피커를 연결해서 듣고 싶어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마치 LP 플레이어처럼 진공관 앰프는 사라지지 않고 진화해서 잠시 소강 상태에 있는 솔리드스테이트를 놓고 1차적으로는 보완 차원의 영감, 좀더 크게는 대안처럼 제시되기도 한다. 그런 배경에는 파라비치니와 같은 독특한 클래스의 양수겸장형 제작자들이 여전히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진공관과 솔리드스테이트 어느 쪽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라 해도 그리 망설이지 않고 추천을 할 수 있는 제품이라 생각된다. 열이 좀 나긴 하지만, 말 그대로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조금’이다. 어두운 감상실에서 이 제품을 마주친다면 눈과 귀, 그리고 마음가짐조차 많이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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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6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