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최윤욱
아날로그를 조금이라도 했다면, 고에츠(Koetsu)라는 이름은 안다. 직접 써보지 않았어도 지인 집에서 한두 번은 들어 보았기 때문이다. 고에츠는 애호가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다 보니 누구나 아는 유명한 카트리지가 되었다. 물론 미야비(Miyabi) 카트리지를 아냐고 물으면, 안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좀더 줄어든다. 미야비(雅) 카트리지를 알 정도면 아날로그에 대한 관심이 깊은 셈이다. 또한 미야비를 안다고 하는 애호가도 키세키(奇跡)를 아냐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갸웃한다.
내가 키세키 카트리지를 처음 만난 것도 20여 년 가까이 된다. 지금은 없어진 오디오숍 주인이 빌려준 것을 듣고는 몸이 달아서 사려고 했었다. 그러나 다른 곳에 이미 팔기로 약속이 되어 있다고 해서 사지 못했다. 오디오 때문에 몸 달았던 몇 안 되는 기억이다. 그 뒤로 기억 속에 잠재해 있으면서 눈에 보이기를 기다려도 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서서히 잊혀가던 기억은 몇 년 전 갑자기 지인에게서 받은 선물 박스를 열면서 살아났다. 선물로 받은 박스 안에 있던 카트리지가 바로 키세키였다. 전통적인 수제 카트리지 3총사를 얘기하자면 고에츠와 미야비, 그리고 키세키라고 할 수 있다. 고에츠가 호방함을 바탕으로 특유의 불꽃 같은 열정이 느껴지는 소리라면, 미야비는 갈고닦고 다듬어서 치밀하게 정련된 우아하고 세련된 소리다. 키세키는 자연스러우면서 느긋하고 여유 있는 울림의 소리다.
미인으로 비유를 하자면 고에츠는 이목구비가 선명하면서 얼굴에 개성이 있는 미인으로 서양인들이 좋아하는 동양미인이다. 미야비는 전통적인 동양적 미인으로 아기자기한 이목구비에 섬세하고 단아한 느낌으로 동양인들이 좋아하는 전통적인 미인상이다. 키세키는 세상 풍파를 거치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고 우아하게 나이 든 여인이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시에 등장하는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 같은 미인이다.
키세키 카트리지는 고에츠나 미야비에 비해서 선열함이나 예리함은 다소 덜하지만, 여유 있고 느긋하면서 자연스러운 사운드를 낸다. 이는 카트리지의 구조에 기인한다. 키세키는 내가 본 어떤 카트리지보다 앞·뒤 길이가 길다. 물론 소릿골을 읽어 들이는 캔틸레버도 특이하다 싶을 정도로 긴 편이다. 캔틸레버가 길면 상대적으로 짧은 캔틸레버보다 느긋하고 여유 있는 음을 낸다. 실제로 알루미늄 캔틸레버 끝에 바늘이 박힌 부분이 손상되어서 잘라내고 당겨서 바늘을 심기도 한다. 캔틸레버가 살짝 짧아지게 수리되어 온 것을 들어보면 반응이 빠르고 기민한 소리가 난다. 같은 카트리지라도 숏암으로 듣다가 롱암으로 바꾸면 소리가 느려진 듯하면서 자연스럽고 여유 있는 사운드가 되는 이치와 같다.
키세키 카트리지의 수입사에서 필자와 키세키의 인연을 본지 글(13년 11월호)에서 보고 리뷰 의뢰를 해왔다. 키세키 신형 카트리지 소리는 어떤지 내심 궁금했기 때문에 나로서는 아주 반가운 제안이다. 청색의 알루미늄 바디로 된 블루(Blue N.S.)를 먼저 들어보았다. 외관은 구형에 비해서 앞뒤 길이가 짧아져서 보통 일반적인 카트리지 형태다. 세팅을 하려고 보니 카트리지의 출력 단자 핀 배치가 일반적인 것과 반대로 되어 있다. 색깔을 잘 보고 좌우가 바뀌지 않도록 끼워야 한다.
키세키 블루는 내부 임피던스가 40Ω으로 중 임피던스 카트리지여서 중 임피던스용 승압트랜스를 연결해야 한다. 서너 개 중에서 고민하다가 노르마 헤일리텍(NHT)에서 발매한 승압트랜스를 걸기로 마음먹었다. 요즘 아날로그계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테데스카(Tedeska)라는 카트리지 제작자인 이현 씨가 제작했던 승압트랜스다. 음의 가닥추림이 좋고, 섬세하며 자연스러운 음색을 그려내는 승압트랜스다.
무엇을 첫 곡으로 들을까 고민하다가 빌리 홀리데이의 ‘Lady in Satin’(CBS CPL-1172)을 걸었다. 예상대로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두텁고 진하게 흘러나온다. 담배 연기에 흐릿해지고 축축한 냄새의 지하 재즈바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키세키 구형 카트리지와 비교한다면 좀더 빠르고 해상력이 증가했다. 신형 키세키는 구형에 비해서 현대적인 사운드로 진화한 것이다. 대편성곡은 어떻게 그려내는지 궁금해서 헨릭 쉐링이 연주하는 랄로의 스페인 교향곡(Living Stereo LSC-2456)을 얹었다. 무대가 좌우로 펼쳐지면서 스페인 교향곡 특유의 다이내믹함이 살아난다. 쉐링의 바이올린 솔로 연주가 나오는데 선율이 살짝 두툼하게 표현된다. 전체적으로 섬세하고 디테일하게 표현하기보다는 큰 무대를 선이 굵게 표현하는 스타일이다. 음색도 재즈에서 더 어울렸다. 전체적으로 클래식보다는 재즈에서 더 좋은 느낌을 받았다.
이제 상급기인 퍼플하트(PurpleHeart N.S.)로 바꿔 듣기로 했다. 모든 조건을 동일하게 하고 카트리지만 퍼플하트로 교체했다. 스페인 교향곡 첫 소절이 나오자마자 퍼플하트가 왜 상급기인지를 보여주었다. 일단 무대의 무게 중심이 아래로 내려가고 좌우·상하로 더 펼쳐진다. 보통 무대가 커지면 악기의 음상도 커지면서 흐려지기 십상이다. 그런데 무대가 더 커졌는데도 불구하고 섬세함과 디테일이 더 좋아졌다. 쉐링의 솔로 연주가 나오는 부분에서 더 리얼해진 바이올린 사이즈와 음색이 나온다. 블루도 좋은 카트리지지만 퍼플하트는 호방한 무대를 그리면서도 중·고음에서 사람을 매료시키는 묘한 음색이 느껴진다. 고에츠처럼 진하지 않고, 은은하게 매혹시키는 음색이다. 키세키의 한자가 기적(奇跡)인데, 왜 이런 글을 붙였는지 이해가 된다.
퍼플하트의 진면목을 더 확인하기 위해서 동일한 조건에서 고에츠 우루쉬 버밀런 카트리지로 바꿔 보기로 했다. 중 임피던스용 승압트랜스라 고에츠에 최적의 매칭은 아니지만 전기적으로 신호 흐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물론 반대로 퍼플하트를 코터 MK2 L에 물리는 것은 전기 신호 흐름에 문제가 있다. 고에츠 우루쉬는 스페인 교향곡 첫 소절부터 ‘나는 고에츠야!’라고 말하듯이 자신의 색깔을 그대로 드러낸다. 좀더 열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무대를 그려내는 것이다. 저음의 힘과 다이내믹은 우루쉬가 더 생생하고 리얼한 느낌이다. 그러나 바이올린 선율의 표현이나 악기 위치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능력은 우루쉬가 퍼플하트에 확실히 밀린다. 음색도 고에츠가 특유의 진한 향으로 취하게 하는 스타일이라면, 퍼플하트는 은은하면서 자연스럽게 매료되게 한다. 첫 음은 우루쉬가 강렬하지만, 듣다 보면 퍼플하트의 매력이 더 우아하고 고급스러워서 더 끌리게 된다. 진한 음색으로 얘기하자면 빠질 수 없는 얀 알러츠와 비교해 본다면 퍼플하트가 색조 화장을 덜해서 좀더 자연스럽고 은은하게 느껴지는 음색이다.
키세키의 블루는 클래식에도 무난했지만 재즈에 더 특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퍼플하트는 올라운드 카트리지지만 클래식에 더 많은 강점을 지녔다. 아날로그한 지가 오래되어 다양한 카트리지를 들어보았고, 이제 더 들어볼 만한 카트리지 없어서 고민이라면 퍼플하트 카트리지를 꼭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퍼플하트는 해상력과 디테일이 충분하면서도 우아하고 그윽한 아날로그 향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카트리지다.
수입원 에이엠사운드 (02)704-1478
Blue N.S.
가격 270만원 바디 알루미늄 알로이, 25mm 롱 캔틸레버 솔리드 보론 로드, 0.28mm 스타일러스 0.12×0.12 누드 라인-컨택트 다이아몬드 출력 전압 0.44mV 주파수 응답 20Hz-25kHz(±1dB) 채널 밸런스 0.4dB 채널 분리도 35dB 다이내믹 컴플라이언스 16㎛/mN 인터널 임피던스 40Ω 무게 8g
PurpleHeart N.S.
가격 400만원 바디 퍼플하트 우드, 30mm 롱 캔틸레버 솔리드 보론 로드, 0.3mm 스타일러스 0.12×0.12 누드 라인-컨택트 다이아몬드 출력 전압 0.48mV 주파수 응답 20Hz-30kHz(±1dB) 채널 밸런스 0.2dB 채널 분리도 35dB 다이내믹 컴플라이언스 16㎛/mN 인터널 임피던스 42Ω 추천 로딩 400Ω 추천 트래킹 포스 2.0-2.6g 무게 7g
<월간 오디오 2017년 10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