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외지에서 젠하이저의 헤드폰 앰프 - 오르페우스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진공관을 전면에 드러낸 세련된 디자인은 고급스러웠으며, 이런 모습의 파워 앰프가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수량은 300조 한정. 가격역시 헤드폰을 포함해 만만하지 않았다. 그 시절에 그 돈이면 제법 괜찮은 오디오 세트를 장만할 수 있었기에,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제품을 살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고가의 헤드폰 앰프는 순식간에 모두 팔렸다. 그리고 완판이 된 후에도 제품을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는 뒷이야기가 들렸다. 그리고 먼 훗날 - 2010년대 중반에 젠하이저는 10년에 걸쳐 완성했다는 ‘뉴 오르페우스 HE1’을 출시했다.
이제 비싼 헤드폰 앰프 이야기는 그만하자. 세월이 꽤 흐르는 동안 사람들이 하이엔드 헤드폰 앰프에 열광하는 상황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많은 이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는 좋은 점도 있지만, 나쁜 점도 있게 마련이다. 그중 우리에게 중요한 음악 감상에 국한하면 도시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대표적인 요인은 소음이다. 도시의 어느 곳에서도 자동차들이 내는 소음은 ‘배경 음악’으로 깔린다. 또한 이웃집 반려견들이 짖는 소리나 시도 때도 없이 벌어지는 공사 소음, 또는 아파트의 층간 소음 같은 것들이 항상 우리를 괴롭힌다. 그 소음들을 듣기 싫다고 내가 듣는 음악의 볼륨을 크게 하는 것도 여의치 않다. 자칫하면 나로 인해 민원이 접수될 수도 있으니까.
헤드폰은 어느새 매우 중요한 음악 감상 도구의 자리를 차지했다. 오르페우스에 놀랐던 시절의 나는 그런 경향을 느끼지 못했기에, 그 비싼 앰프에 열광하는 이들은 단지 남아도는 돈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던 갑부들이라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부를 과시하고자 했다면 집안 한구석에 가만히 놔둘 - 게다가 오디오에 관심이 없는 방문객들은 봐도 뭔지도 모를 - 헤드폰 앰프 따위에 신경을 쓸 리는 없다. 헤드폰을 사용해야 하는 자신의 환경에서, 인티앰프나 리시버에 구색 갖추기로 제공되는 헤드폰 단자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들은 최고의 음악적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진짜 앰프’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시장은 시대의 흐름을 보여 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오디오 시장에도 헤드폰 앰프들이 하나둘씩 등장하더니 이젠 제법 많은 제품들이 장르를 형성했다. 다만 많은 제품들이 본격적인 오디오 시스템의 품질에는 미치지 못하는 ‘보급품’ 수준이라는 것이 다소 아쉽다. 그리고 예컨대 반도체 대신 진공관을 사용한다거나 하는 독특한 취미성을 가진 제품들도 드물다. 그런데 마치 필자의 아쉬움을 꿰뚫어 본 것처럼 새로운 헤드폰 앰프가 등장했다. 칵테일 오디오의 500H가 그것이다.
칵테일 오디오는 최근 들어 프로 시리즈를 출시하며 하이엔드 시장에도 진출하고 있으며 고급스러운 외관과 우수한 성능으로 많은 애호가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프로 시리즈는 최근에 출시된 최고의 부품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주목받고 있는데, 예컨대 X45 Pro는 DAC 칩에 ESS 사의 최신 플래그십 ES9038PRO를 장착해서 채널당 무려 16개의 DAC가 동작해 다이내믹 레인지를 극대화했고, X50 Pro에는 클록 발생기로 하이엔드 제품에서 주로 사용되는 TCXO의 성능을 크게 능가하는 크리스텍 사의 CCHD-575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시도들은 국내에서 최초인 것은 물론, 해외에서도 그 예가 드물다.
500H는 비록 프로 시리즈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두꺼운 알루미늄 패널과 정밀한 만듦새, 엄선된 부품들을 보면 프로 시리즈에 포함시킨다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500H에는 그동안 칵테일 오디오의 제품이라면 반드시 포함되었던 네트워크 플레이어 및 서버 기능이 빠져 있다. DAC와 아날로그 프리앰프만을 추가한 순수 오디오 기기인 것이다. 칵테일 오디오의 제품들이 멀티미디어와 네트워크, 통신 분야에 축적된 풍부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각광을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는 칵테일 오디오가 오디오 메이커로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500H의 가장 큰 특징은 헤드폰 앰프로는 드물게 진공관을 장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용된 진공관은 쌍3극관 12AU7. 따듯하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이 진공관은 아마도 모든 진공관 중에 약방의 감초처럼 오디오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제품이 아닌가 싶다. 즉, 500H의 사용자는 12AU7을 자신의 취향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다. 게다가 이 앰프는 OP 앰프 출력단도 갖고 있다. 즉,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혹은 음악 장르에 따라 진공관 소리와 반도체 소리를 선택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진공관을 다른 메이커의 제품으로 교체함으로써 다양한 소리의 변화도 즐길 수 있으니, 취미성 면에서 이 제품은 그 어떤 헤드폰 앰프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다.
500H가 갖고 있는 단자들을 살펴본다. 아날로그 입력으로 RCA, XLR 단자가 있고, 디지털 입력으로 광과 동축, AES/EBU, 그리고 요즘 쓰임새가 점점 많아지는 HDMI를 갖고 있다. USB B 단자를 제공해 PC와 직결할 수 있게 만들어 둔 것도 반갑다. 출력은 밸런스와 언밸런스를 모두 지원하며 파워 앰프를 연결하면 500H는 DAC와 프리앰프로 동작하게 된다. 헤드폰 연결은 전면에 6.5mm 언밸런스 단자와 밸런스 4핀 단자를 모두 구비해 하이엔드 헤드폰과의 호환성을 넓혔다.
또한 인상적인 점은 어댑터를 사용하지 않고 본체에 칵테일 오디오에서 설계한 전원부를 내장했다는 점이다. 이는 어댑터를 의식하고 중국에서 개발된 6J1 등의 진공관을 사용하지 않고 12AU7을 고집함으로써 생긴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오디오에서 전원부의 중요성은 더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인데, OEM으로 공급되는 범용 어댑터에서 ‘오디오 그레이드’의 품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을 생각하면 환영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취향에 따라 전원 케이블을 교체할 수 있다는 - 비애호가라면 이해하지 못할 - 잔재미를 누릴 수 있다. 이외에 단자나 부품들은 모두 엄선된 고급품을 사용하고 있으며, DAC 칩은 X45에 사용된 사브레32 ES9018K2M을 채널당 하나씩 사용한다.
음악에서 감동을 취하는 것은 분명한 사적 영역의 일이다. 애호가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자신이 남들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으면서 마음껏 음악을 즐기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에 사는 이들이 대형 스피커를 통해 음악을 즐기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대안은 헤드폰이다. 굳이 젠하이저의 오르페우스와 같은 최고급 기기를 구입하지 않더라도, 500H와 같이 제대로 만든 헤드폰 앰프와 음질이 좋은 헤드폰을 곁에 둔다면 모두가 깊게 잠든 한밤중에도 브루크너를 충분한 음량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든 상관없다. 자동차의 소음도, 옆집 반려견의 짖는 소리도, 어디선가 인테리어 공사를 하며 내는 소음도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음악과 감동만이 남는 것이다.
문의 헤르만오디오 (010)4857-4371
<월간 오디오 2019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