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월간오디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남녀노소란 말이 정말 어울리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남녀노소’가 한결같이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문자를 교환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웹서핑을 하거나 음악을 듣는다. 책이나 꺼내 보려던 나는 영락없는 이방인의 기분이 되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지하철에서 신문을 팔던 그 시절. 그때도 사람들은 부지런히 뭔가를 읽거나 들었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며 알바비로 구입했던 휴대용 플레이어. 여러 번 떨어뜨려 박살이 날 때까지 휴대용 플레이어를 손에 들고 다녔고 자주 이어폰을 꽂고 다녔다. 집에서 CD를 가지고 나오면 여러 번 반복해서 끝까지 들어야 했기에 말러, 쇼스타코비치처럼 긴 곡들에 익숙하게 된 것도 그 덕이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이 생길 때면 학교 음악 감상실에서 점심시간 내내 앉아 있을 때도 있었다. 끼니를 거르고 엄숙한 분위기의 감상실에 앉아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심오한 인문서나 철학 서적을 읽을 때의 희열 같은 것이 느껴지곤 했다. 새로운 음악들을 알게 되는 즐거움도 컸지만, 감상실의 작은 오디오가 선사하는 ‘음의 감동’을 느끼면서 나만의 오디오를 꿈꾸기도 했다. FM 방송에서 클렘페러의 베토벤을 듣고 오랫동안 음반을 구하지 못해 애태웠던 적도 있는데, 일본 여행을 떠나는 지인에게 부탁해 간신히 음반을 손에 넣고 처음 음반을 걸 때 느꼈던 흥분은 하나의 사건처럼 기억된다.
하지만 요즘은 음악을 듣는 것이 너무 편해졌다. 한 달에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면 수십만, 수백만 곡의 음원을 접할 수 있다. 클릭 몇 번이면 클렘페러의 음반들이 연도별로 빠짐없이 정리되는 그런 세상이다. 이런 음원들을 스마트폰에 담고 귀에 이어폰을 꽂으면 언제 어디서든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혼수품 목록에서 TV와 함께 ‘Must Have’ 아이템으로 분류되던 오디오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되고, 음악을 좀 듣는다는 사람들마저 이어폰이나 블루투스 스피커 정도로 만족하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어폰이나 블루투스 스피커의 ‘경박단소(輕薄短小)’를 지켜보는 일은 아무래도 못마땅하다. 클릭 몇 번, 탭 몇 번으로 음악을 즐기는 것은 무척이나 편한 일이지만, 이렇게 쉬운 일에는 감동이나 보람이 그리 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어폰이나 블루투스 스피커 말고 ‘제대로 된’ 오디오로 음악을 들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오디오 시장이 위축되는 상황이지만,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음악의 감동을 제대로 들려줄 수 있는 입문용 기기들이 좀더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항상 하고 있다.
최근에 발매되어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비트 앤 비트의 D/A 컨버터 블루댁(BLUEDAC)은 그런 맥락에서 참으로 만족스러운 기기였다. 신뢰도 높은 국산 제품으로,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에 PCM 32비트/384kHz의 파일과 DSD256 음원을 재생하며, 블루투스 apt-X를 지원하는 등 막강한 스펙을 지닌 제품이었다. 썩 괜찮은 음질은 물론, 알루미늄 판재를 벤딩해 볼트 하나 보이지 않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섀시에 이르기까지,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흠잡을 곳을 찾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던 것이다. 다만 이 D/A 컨버터와 함께 사용할 앰프를 고르려면 꽉 막혀 버리는 기분인데, 가격이 비싸거나 앰프가 너무 크거나 디자인이 너무 이질적이거나 한 기기들을 제외하다 보면 매칭 상대를 찾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트 앤 비트에서 블루댁과 짝을 이룰 인티앰프 - 블루앰프(BLUEAMP)를 출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음질은 물론이고 가격이나 디자인 모두 블루댁과 잘 어울릴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큰 기대를 하고 고급스런 상자를 열어 보니, 과연 블루댁과 동일한 형태의 섀시에 높이만 두 배 정도 되는 외관의 앰프가 들어 있다. 그런데 상당히 묵직하다. 작은 앰프이므로 막연히 요즘 유행하는 디지털 앰프일 것이라 예상했는데, 양옆 패널의 대형 방열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디지털 칩은 열이 많이 발생하지 않으므로 방열판을 생략하고 섀시 바닥에 칩을 붙여 두거나 내부에 작은 방열판을 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블루앰프는 크기는 작아도 정통 아날로그 앰프인 것이다. 전원부를 보면서 다시 한 번 놀랐는데, 당연히 스위칭 전원부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예측이 또 한 번 빗나갔다. 블루앰프는 대형 토로이달 트랜스포머를 사용하고, 필터 커패시터의 용량이 무려 80,000㎌이나 되는 ‘물량형’ 리니어 전원부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시대의 앰프라기보다는 그리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기본에 충실한, 게다가 훌륭한 음질을 들려주었던 미션, 네임, 뮤지컬 피델리티, 오라 등 예전 영국산 앰프를 보고 있는 기분이다.
입력 단자는 모두 아날로그로서 밸런스 하나와 언밸런스 두 개를 제공한다. 비슷한 가격대의 앰프들이 대개 USB와 같은 디지털 단자를 갖고 있는데, 블루앰프는 블루댁과 함께 사용될 것을 전제했기 때문에 과감하게 디지털 단자를 제외시킨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음질상으로는 장점이 된다. 거의 모든 DAC에서 아날로그 회로와 디지털 회로의 전원부를 격리시키는 것은 상식에 속하는데, 디지털 회로는 고주파 신호를 다루므로 직·간접적으로 아날로그 회로에 간섭을 일으켜서 음질을 열화시키기 때문이다. 즉, 블루앰프는 음질을 우선시한 본격적인 하이파이 기기라고 할 수 있다.
출력단은 FET 싱글 푸시풀 구성이다. 싱글 푸시풀 구성은 채널당 (+), (-) 두 개의 출력석만을 사용하므로 대출력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소리의 번짐이나 왜곡이 적고 단정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출력은 채널당 50W로서 실용상으로 충분한 수준. 주파수 특성은 10Hz-100kHz로 광대역 특성이 돋보이며, 왜율 역시 0.005%이니 매우 우수한 스펙을 갖고 있다 하겠다.
이제 소리를 들어 본다. 컴퓨터에서 광 출력으로 블루댁과 블루앰프를 연결하고, 스피커는 예전 ‘영국’의 느낌을 살려 로이드의 신트라를 걸었다. 앰프나 스피커에 따라 목소리가 바뀌는 리키 리 존스는 고역이 강조된 시스템에서는 철없이 발랄해지고, 저역이 강조된 시스템에서는 너무 슬프고 코맹맹이 소리도 심해지는데, 이 조합에서는 절묘하게도 ‘중립’을 지킨다. 적당히 슬픈 느낌도 나고 코맹맹이 소리도 살아있는데, 축 처지는 느낌은 들지 않는 것이다. <튜티> 음반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고역이 풍성한 저역에 묻히지 않고 생생하게 들리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데, 이 작은 시스템에서 밸런스가 흐트러지지 않는 것도 신기하다. 음악을 듣다 보니 열이 제법 나는데, 바이어스를 깊게 걸어 A급 증폭에 가깝게 설계한 것 같다. 작은 시스템인 만큼, 넓은 장소에서 쾅쾅 울리기보다는 작은 방이나 책상 위에서 질 좋은 북셀프 스피커를 가까이 두고 적당한 볼륨으로 울리고 싶다.
스마트폰으로만 음악을 듣는 요즘 세대를 하이파이 오디오가 선사하는 감동의 세계로 안내할 만한 훌륭한 입문기의 등장이 반갑다. 어쩌면 그들의 삶에 베토벤이나 모차르트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지도 모를 일이다.
문의 헤르만오디오 (010)4857-4371
가격 105만원 실효 출력 50W 주파수 응답 10Hz-100kHz(±0.1dB) THD 0.005%
S/N비 90dB 입력 감도 29dB 출력 임피던스 4-16Ω 크기(WHD) 20×11×24cm 무게 6.1kg
<월간 오디오 2016년 9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