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편
파워 케이블을 비교 시청하는 일은 언제나 가슴 설렌다. 오디오 시스템이 고정된 상태에서 소스기기나 앰프, 아니면 멀티탭에 들어가는 파워 케이블을 바꿨을 때의 소리 변화가 예상외로 크기 때문이다. 1.5m 정도에 불과한 파워 케이블 하나 바꿨다고 호들갑은? 이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당신, 틀리셨다. 대한민국 오디오 제작사 올닉(Allnic)의 파워 케이블 ZL-5000이 그 명백한 증좌다.
고백컨대 필자는 자택 멀티탭과 연결된 메인 파워 케이블로 올닉의 ZL-3000을 1년 넘게 써오고 있다. 리뷰용으로 듣다가 도저히 못 빼 그대로 정착했다. 랙 뒤에 가려져 있어 1년에 제대로 얼굴 보는 날은 손꼽을 정도이지만, ZL-3000 투입으로 인해 소스기기와 앰프들이 제 실력을 마음껏 뽐내고 있음은 매일매일 체감하고 있다. 그만큼 ZL-3000이 전해준 청감상의 놀라운 변화들, 즉 노이즈가 사라지고 배경이 정숙해지며 다이내믹스가 상승하는 짜릿한 쾌감이 대단했던 것이다.
ZL-5000은 이 ZL-3000의 상급 모델로 최근 출시됐다. ZL은 진공관 앰프로 유명한 올닉이 케이블 제작에 투입한 기술 ‘Zero-Loss Technology’의 약자다. 케이블로 음악 신호나 대전류를 보낼 때 그 어떤 손실도 제로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현재 ZL 테크놀로지가 투입된 올닉의 케이블은 파워 케이블 2종을 비롯해 인터커넥터(Mu-7R RCA, XLR), 스피커 케이블(ZL-3000, ZL-5000), 디지털 케이블(Mu-7R Coax, AES/EBU), 포노 케이블(Mu-7R Phono) 등 총 10개에 이른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ZL-5000 파워 케이블로 올닉의 기라성 같은 케이블 라인업이 마침내 완성된 것 같다.
ZL-5000의 설계 디자인
ZL-5000은 첫눈에 보기에도 ZL-3000에 비해 풍모를 일신했다. 길이는 1.8m로 동일하지만, 케이블 직경이 14.5mm에서 19mm로 늘어났고 두랄루민 재질의 하우징도 두꺼워지고 길어졌다. 캘리퍼스로 직접 재보니 플러그쪽 하우징은 8.2cm에서 10.6cm로, IEC쪽 하우징은 7.1cm에서 9.0cm로 늘어났다. 선재가 굵어졌다는 것은 대전류 전송을 위한 설계, 하우징이 두터워지고 길어졌다는 것은 안정성 보강을 위한 설계로 보인다. ZL-3000의 와인빛 피복을 감싸던 차폐용 동선이 ZL-5000에선 사라지고 피복 색깔 자체도 짙은 남색으로 변했다.
하지만 역시 세상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필자가 올닉 케이블을 들을 때마다 감탄했던, 마치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ZL 테크놀로지에 담긴 획기적인 기술력이 이번 ZL-5000에도 고스란히 담겼다. 그것은 바로 오디오 케이블의 3대 저항(접촉 저항, 연결 저항, 도체 저항)을 줄이기 위한 올닉만의 설계 디자인이다. 더욱이 인터 케이블(통상 몇 십mA)에 비해 더 많은 전류(1000W 앰프의 경우 3.2A)를 흘려보내야 하고, 임피던스 값이 측정 불가일 정도로 낮은 파워 케이블에서는 이 3대 저항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것이 필수다.
예를 들어 파워 케이블의 임피던스 값만 놓고 따져보자. 스피커 케이블의 임피던스는 통상 8Ω, 인터 케이블은 아무리 낮아도 몇 십Ω에 달하지만, 파워 케이블은 몇 만분의 1에 불과할 만큼 임피던스가 극단적으로 낮다. 이는 한전에서 공급하는 전기 자체의 임피던스가 낮기 때문이다. 만약 이 임피던스가 조금이라도 높게 되면 그만큼 손실이 많다는 것이기 때문에 한전 입장에서 전기를 멀리, 각 가정으로 충분히 보내지 못하게 된다. 한마디로 파워 케이블은 대전류가 흐르는 데다 교류 저항이라 할 임피던스까지 극단적으로 낮기 때문에 케이블 내 3대 저항은 더욱 낮아야 한다는 얘기다.
ZL-5000은 우선 특허 출원 단자를 통해 콘센트-케이블 AC 플러그(수컷), 기기 인렛단-케이블 IEC 단자(암컷)의 접촉 저항을 줄였다. 베릴륨 동 재질의 AC 플러그는 그 끝이 6분할됐고 안에 고탄성 고무가 들어갔는데, 이는 플러그와 콘센트의 접촉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다. 또한 베릴륨 동을 열처리해 제작(로듐 도금 및 극저온 처리), 단자의 반발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IEC 단자가 일반적인 클립 형태가 아니라 상자 모양인 것도 기기 인렛단의 금속봉과 4면에서 접촉하기 위한 설계다. 단자도 금속 소재 중 가장 탄성이 좋은 티탄동을 사용했다.
ZL-5000은 이 밖에 양쪽 단자와 내부 선재를 1000도 이상의 초 고온 용접으로 한 개체로 만듦으로써 연결 저항을 줄였으며, 도체 자체도 ZL-3000(4mm)에 비해 더 굵은 고순도 동선을 써서 도체 저항을 줄였다. 박강수 대표에 따르면 선재 자체의 굵기가 ZL-3000에 비해 훨씬 두꺼워졌으며, 공개할 수는 없지만 1차 실딩을 위한 도금 상태 또한 크게 바뀌었다고 한다. 외피에 있던 구리 실드선을 선재와 외피 사이에 집어넣은 것도 완벽한 이중 실드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다.
시청
시청은 ZL-5000과 비슷한 가격대의 파워 케이블을 멀티탭(노도스트 QB4)에 꽂았을 때(A)와 ZL-5000을 꽂았을 때(B)를 비청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멀티탭에는 올닉의 프리앰프 L-8000 DHT와 올닉의 모노블록 파워 앰프 M-5000 타이탄이 물린 상태. 소스기기(오포 BDP-105D, 올닉 D-5000 DHT)는 다른 멀티탭에서 전원을 공급받으며, 스피커는 포칼의 스텔라 유토피아 EM을 동원했다.
A 상태에서 나윤선의 ‘아리랑’을 들어보면 공간감이 그윽하게 펼쳐지는 가운데 배음과 잔향이 적당하다는 인상. 노이즈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크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다. 기타 음이 약간 두터운 것을 보면 음의 윤곽선이 예리한 상태는 아니다. 그러다 ZL-5000으로 바꿔보니, 세상에, 악기의 실체감이 갑자기 몇 배는 상승한다. 보컬 목소리의 리퀴드함이나 표현력이 크게 늘었다. 더 스무드하고 간드러지게 노래한다는 느낌. 노이즈가 사라진 모습에 감격할 정도다. 이러한 청감상 변화는 A는 물론이거니와 ZL-3000 때보다 더 심한 것 같다. 다이내믹 레인지도 더 넓어졌고, 음의 표면 역시 더 매끄러워졌다.
ZL-5000으로 들어본 피에르 불레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불새 중 ‘카세이 무리들의 춤’과 ‘자장가’는 A 때에 비해 브라스의 울림이 더 두터워지고 펀치력도 묵직해졌다. A 때가 식사 전이었다면 지금은 밥 잘 먹어 혈기왕성하게 연주하는 느낌. 비 온 뒤 잎사귀에 있던 먼지가 싹 씻겨 내려간 듯 깔끔하고 말쑥한 색채감도 대단하다. 풋워크 또한 상당히 경쾌해져서 음들이 바닥이나 스피커 유닛에 들러붙지 않고 일제히 숭숭 피어오른다. 다이내믹스의 상승 역시 체감상 변화가 커서 마치 경전철을 타다가, KTX를 탄 느낌이다. 그렇다고 주구장창 달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완급과 강약까지 능수능란하게 조절하고 있어 더욱 놀랍다.
레이 브라운, 존 클레이턴, 크리스찬 맥브라이드 등 베이시스트 3인이 연주한 ‘Brown Funk’를 A로 들어보면, 현장감, 사운드 스테이징, 이미징, 탄력감은 어디 딱히 불만스러운 데가 없다. 하지만 음끝은 약간 무디고 야무지지 못하다는 인상이다. ZL-5000으로 바꿨다. 갑자기 음에 에지가 생기며 팔딱팔딱 뛰는 모습이 마치 활어 같다. 노이즈는 마침내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모두 증발해버렸다. 비로소 알겠다. A는 데드였고, 지금은 라이브다. A는 스테이틱(Static)이고, 지금은 다이내믹(Dynamic)이다. A는 가루를 탄 주스였고, 지금은 생과일 주스다.
총평
계속해서 미네소타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오페라 마제파 중 ‘Hopak’ 춤곡을 들어봐도 말쑥한 배경과 선명한 사운드가 어김없이 도드라진다. 빨래를 마치고 뽀송뽀송해진 흰 기저귀에서 나는 바로 그 향기가 ZL-5000에서 난다. 안 들리던 소리가 여럿 들리고, 다이내믹 레인지는 마치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무참해진 A 파워 케이블이 안쓰러울 정도다. 자택에서 사용 중인 ZL-3000과 일대일 비청은 안 해봤지만, 정숙도와 선예감, 다이내믹 레인지가 더 개선된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자신의 값비싼 오디오 시스템에서 뭔가 갈증을 느끼는 오디오 애호가들에게, 그리고 파워 케이블 효용 한계론자들에게 일청을 권한다. ZL-5000이 직접 말을 건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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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오디오 2018년 1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