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월간오디오
지난 세기 초부터 일어난 ‘음반 혁명’은 우리에게 연주회장에 가지 않고도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음반들은 SP와 LP의 시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좋은 음질을 갖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연주회의 ‘가격대 성능비’는 점점 더 떨어지게 되었다. 특히 음이 변하지 않는 디지털 매체, CD의 등장은 실로 우리 애호가들에게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시기만 하더라도 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음반의 보유량은 ‘권력’의 크기를 의미했다. 하지만 현 세기에 접어들면서는 약간이나마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음반 컬렉터들에게는 아쉬운 일이지만, 그 알량한 권력마저도 빼앗기게 되었다. 심지어는 아예 음반들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애호가들은 음원 파일을 컴퓨터에 저장하거나 스트리밍을 통해 음악을 듣게 되었으며, 이제는 한 달에 CD 한두 장 값만 지불하면 누구나 수백만 장의 라이브러리를 가질 수 있다. 예전에는 음악을 특별히 좋아하던 사람들이 음반을 모으는 데 훨씬 많은 돈을 써야만 했지만, 이제는 어쩌다 한두 번 음악을 듣는 사람들과 똑같은 비용을 지불하며 훨씬 더 많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가끔씩 잊어버리지만, 우리는 인터넷만 연결되어 있다면 누구나 공평하게, 그리고 아무 때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실로 천혜의 환경에서 살고 있다.
음악 감상에서 경제적인 평등을 갖게 된 우리들은, 역시 하루 24시간이라는 평등한 시간을 살아간다. 때문에 같은 시간에 좋은 음악을 더 많이 듣기 위해서는, 그 많은 음악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가 아주 중요한 이슈가 된다. 오디오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기기들의 종류도 많지 않았고, 특별히 첨단 기술을 모르더라도 사용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몇몇 명기들이 회자되었고, 그중에서 자신의 형편에 적당한 것을 가려 쓰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디지털 기술에 기반한 생소한 기기들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들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면, 이 시대의 기술에 힘입은 고도의 편리성을 획득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컴퓨터와 디지털에 익숙하지 못한 많은 이들에게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결국 현 오디오 시장에서 애호가들은 자신의 환경과 어울리는 제품을 분별하고, 이를 바르게 선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복잡한 시기에 TDL 어쿠스틱스(Acoustics)에서 진공관 앰프가 출시되었다. TDL 어쿠스틱스는 진공관 전문 브랜드를 표방하며 우드 케이스 제작을 비롯해 제품 기획 및 내부 설계,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의 장인들이 모여 앰프 제작에 참여했다. TDL 어쿠스틱스의 시작은 평생 동안 오로지 진공관을 사랑하고 진공관 앰프로 음악을 들어왔던 한 명의 열렬한 애호가로부터 비롯되었다.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오디오 업계에서 일하게 되었고, 음악의 소스가 디지털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도 따듯한 아날로그의 감성이 구현된 진공관 앰프에 대해 애정을 버리지 않았다.
여러 진공관 앰프들을 일일이 뜯어서 소자들을 비교하고 조립과 납땜을 해보면서, 때로는 애호가의 시선으로, 때로는 제작하는 사람의 눈으로 면밀하게 분석했다. 오랜 세월 몰두했던 경험이 축적되면서 그는 점점 객관적이고 냉철한 안목을 갖게 되었다. 당장 제품을 만들어도 충분했을 것이지만,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첫 시제품을 제작하고 출시하기까지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완성도를 높여가는 과정은 그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어떤 제품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정성이 깃든 제품을 만들어 낼 때까지, 제반 인프라들을 차근차근 구축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 30년간 지속된 한 인간의 집념과 열정은 인티그레이티드 앰프 M88에 착실하게 담겨 내 앞에 나타났다.
M88은 생김새부터 기존의 천편일률적인 진공관 앰프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매킨토시, 피셔, 마란츠 등 명기들의 전성기 시절인 30~40년 전 즈음 유행처럼 번지던 우드 케이스 빈티지 진공관 앰프를 보는 느낌이다. 특히 두꺼운 알루미늄 패널을 사용하고 주위를 목재 케이스로 감싼 모습은 중후하면서도 아날로그 감성을 물씬 자극하며, 정교한 가공 상태는 소재나 질감에서 매끄러운 현대적 감각을 느끼게 한다.
진공관은 윗면에서만 은은하게 볼 수 있도록 조금은 가려져 있지만, 대신 전면 패널에는 좌우 아날로그 레벨 미터가 장착되어 음악을 듣는 재미를 ‘시각화’해주며, 짙은 주홍빛이 감도는 레벨 미터는 무드등처럼 밝기를 조절할 수도 있다. 그중 너무도 반가운 기능 중 하나는 요즘 앰프에는 거의 장착되지 않는 라우드니스(Loudness) 기능이다. 꺼져 있을 땐 다이렉트(Direct)로 순수한 A급 사운드를 들려주지만, 작은 소리로 음악을 들을 때 저역의 양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라우드니스를 작동시켜 저음과 고역의 대역을 폭넓게 확장해 청감상 평탄하게 들리도록 특성을 보정해주는 기능으로, 요즈음 주거 환경에 꼭 필요하면서 아날로그 시절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핵심 기능이다.
프리앰프관 하나와 두 개의 드라이브관, 출력관은 KT88(KT90, 6550) 네 개가 사용된 평범한 구성이다. 그런데 독특한 것은 출력관을 EL34(6L6)로도 바꾸어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변환 스위치가 있어서, 앰프를 끈 상태에서 위의 커버를 탈착하고 진공관을 바꿔 꽂은 뒤 스위치만 바꾸면 된다. 개인적으로 요즘 진공관 앰프에서 KT88이 너무 자주 사용되는 경향에 다소 불만이 있었는데, 참으로 반가운 아이디어다. 나는 오래전부터 비록 EL34가 힘은 조금 떨어질지라도, 음악성 면에서는 KT88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KT88과 EL34 진공관을 모두 구비해 놓을 수 있다면, 때에 따라 바꿔 봄으로써 두 대의 앰프를 사용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의 따스함이나 질감보다는 고출력 스펙만 요구하는 요즈음 보기 드문 클래스A로 동작하며 정격 출력은 25W+25W. 요즈음 출시되는 진공관 앰프들이 푸시풀 구성으로 채널당 50W를 내는 것에 비하면, M88은 KT88을 사용하는 앰프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낮은 출력을 낸다. 이는 진공관의 수명을 고려한 점도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M88의 출력관들이 클래스A 푸시풀로 동작되기 때문이다. 즉, M88은 신호를 나누지 않고 증폭하므로, B급 앰프 증폭에서 발생하는 스위칭 왜곡이 근원적으로 없다.
자동차에서 파워와 토크만 강조되는 4기통 터보 엔진과, 힘은 조금 부족하지만 실키 사운드와 부드러운 회전 질감, 내구성 등을 갖는 6기통 엔진을 예로 든다면 아마도 적절한 비유가 될 것이다. KT88을 보통 ‘힘’의 대명사로 생각하고, 이를 중시하는 설계가 대다수인 지금의 오디오 시장에서 참으로 독자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50W의 거친 소리를 내는 앰프와 25W의 맑고 윤기 있는 소리를 내는 앰프 중 하나를 고르라면 망설일 생각이 전혀 없다.
하나 더 하드웨어적인 특징을 언급하자면, 트랜스포머를 들 수 있겠다. 전원용으로 토로이달 트랜스포머를 사용하고, 출력 트랜스포머로 EI형을 사용한 것은 두 타입의 트랜스포머가 갖는 각각의 장점을 살린, 실로 지혜로운 설계다. 장인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정성껏 감아 만든 것은 이 부분이 진공관 앰프의 음질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류관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정류관보다 수명이 월등하게 길고 정밀한 다이오드 정류와 반도체 소자들을 사용하고, 전원을 켰을 때 30초 동안 서서히 전류를 증가시키는 ‘소프트 스타트’ 기능을 포함한 것은 진공관 앰프의 태생적인 한계점으로 자주 거론되는 내구성 문제를 근본적으로 보강해주는 중요한 장치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현시대에 걸맞은 진공관 앰프답게 PC-USB DAC를 내장하고 있으며, 요즘 상당수의 애호가들이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점을 고려하여 헤드폰 단자를 장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버 브라운 칩을 사용하여 32비트/384KHz 고해상도의 음원을 지원하는데, 이조차도 설계자가 평생을 집착해온 아날로그 감성을 최대한 뽑아내기 위해 공들여 제작되었다. 비록 아날로그적 감성을 물씬 느끼게 하는 외관과 음질을 지닌 앰프이지만 사용자들을 위한 제작자의 아낌없는 배려가 돋보이는 기능들의 탑재는 이 브랜드가 철저히 유저의 입장에서 제품을 만들어가는 곳임을 알게 해준다. 이와 더불어 리모컨도 볼륨 외에 셀렉터까지 지원하므로, 요즘 시대의 진공관 앰프로서 흠잡을 곳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컴퓨터와 연결한 후 최신 음원 파일을 ‘고색창연한’ 진공관 앰프로 듣는다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이기에 누릴 수 있는 축복이 아닐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못한 관계로 소리를 오래 들어볼 수는 없었지만, KT88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윤기가 있고 따스하다. 그리고 25W의 출력은 일반적인 가정의 리스닝 룸에서는 전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진공관 앰프를 사랑하는 애호가들은 반드시 한 번 들어 볼 것을 권한다. 서두에 선택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고 길게 썼던 것은, 바로 M88과 같은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월간 오디오 2017년 12월 호>